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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11.21. 금요기도회 - 구원받을만한 믿음(사도행전 85)





본문 : 사도행전 14장 8–10절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서 겨우 벗어난 바울과 바나바였지만 그들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가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루스드라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또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로 바울의 일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성경과 그 당시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에 안성마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복음 사역에 있어서 바나바보다 바울이 앞장 설 수 있게 된 것은 바나바가 바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바나바는 적어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자기 보다 바울이 더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자신이 감당하던 일을 바울에게 맡기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선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바나바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있어서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집착과 헌신의 차이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집착하게 되기가 정말 쉬운데요. 때로 우리는 집착과 헌신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집착은 그 일을 망가뜨리기가 쉽고 헌신은 그 일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확실히 구분되어야 하고, 그 일에 대한 나의 태도가 헌신이 아니라 집착일 때는 빨리 태도를 바꾸든지 혹은 그 일을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집착에 항상 동반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집착에는 무엇보다도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이 끼어듭니다. 이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일에서 내가 멋진 결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나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면 속이 상하고, 그래서 남이 나보다 더 큰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을 은근히 시기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과 마음이 동반된다면 그 때는 헌신이 집착으로 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바나바가 신참인 바울에게 복음사역의 중심이 되는 역할을 맡기고 뒤로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헌신한 사람이었지 그 일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기에 자기보다 더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착은 그 사람과 일 모두를 망칩니다. 그렇지만 참된 헌신은 그 사람도 살리고 일도 살립니다. 우리 자신의 일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일인 경우에는 우리는 더욱 더 그 일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직접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은 우리들이지만 결과는 철저히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나에게 맡겨진 인생과 하나님의 일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그 일에만 헌신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아주 유심히 듣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모르지만 그 사람은 나면서 부터 다리를 쓰지 못했던 아주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울에게 집중했듯이 바울 또한 그런 그를 시야에서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해보면 그렇습니다. 솔직히 집중하지 못하고 듣지 않는 분들은 쳐다보지 않게 됩니다. 눈을 감고 계시거나 꾸벅 꾸벅 조시는 분들은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설교하기가 너무 어려워지고 저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저를 집중하여 바라보며 설교를 듣는 분들은 계속해서 쳐다보게 됩니다. 가끔씩 우리 목사님은 왼쪽만 보신다, 오른쪽만 보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쪽에 집중해서 경청하시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로 눈길이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내내 그 사람은 가장 진지한 태도로 바울에게 집중했고 그래서 바울도 그 사람을 주목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다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구원 받을만한 믿음’을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아주 특별한 은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괜히 오늘 말씀 보고서 저에게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물으시면 안됩니다. 저에게는 이런 은사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그 사람에게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본 사도 바울이 그를 다시 걷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생전 단 한 번도 걷지 못했던 그가 바울의 말 한 마디로 일어서고 또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에게 있었던 구원받을만한 믿음과 절대로 치료 불가능했던 그의 장애가 치유된 것을 직접 연결 짓고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몰라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의 믿음이 곧 치유의 이유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또 누군가를 치유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과 치유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 사이에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골로새서 공부를 다 마쳤으니까 이번 주일 오후부터는 다시 교리 공부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데요. 우리가 전에 교리를 공부할 때, 믿음에 대해서 반복해서 공부한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서도 몇 번이나 강조했던 것이구요. 믿음에 대한 것인데요.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 나십니까? 다시 한 번 복습 삼아서 따라해 볼까요? “믿음은 / 은혜를 받는 / 유일한 손이다.” 다시 한 번 “믿음은 / 은혜를 받는 / 유일한 손이다.” 어떤 사람의 구원, 그리고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은혜는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생각이 없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은혜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성경이 그토록 믿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능력 있는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고 그 은혜가 우리를 든든히 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외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한 믿음을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삶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외만 붙들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감 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떨어지는 감을 줍게 될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떨어지는 감만 기다리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이런 바람조차 없다면 그 사람은 정말 안스럽고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바램이 있다고 해도 그 바램을 믿음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그저 바램에만 머물게 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감나무 이야기를 드렸으니 감을 가지고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누가 감을 먹을 가능성이 가장 높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첫번째, 감을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그저 감을 먹고 싶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입니다. 세째, 감나무 밑에서 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네째, 그 감나무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감을 따는 사람입니다. 누가 감을 먹을 가능성이 높겠습니까? 그리고 감을 먹을 때 누가 가장 맛있게 먹겠습니까? 네번째 사람입니다. 제가 누가 가능성이 제일 높겠느냐고 말씀드렸지만 실은 제대로 된 감을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마지막 네 번째 사람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떤 모양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네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을 가장 많이 닮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런 모습으로 제대로 된 은혜, 정말 능력 있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참된 믿음이 있고 그래서 능력있는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는 항상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큰 기적도 일어나지만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작은 기적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와 일하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그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구원 받을만한 믿음 덕분에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그런 식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이 걷게 된 것에 주목해 본다면 구원얻은 사람의 삶에 일어나는 기적들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치유와 회복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요. 그 믿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그 이전까지 해결할 수 없었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체적인 질병이 치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작은 일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속 사람이 치유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 이전까지는 전혀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감춰 놓았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상처들이 치유됩니다. 약한 자는 강해지고 이미 받은 상처 때문에 계속해서 쉽게 상처를 받았던 사람은 상처에 강한 사람이 됩니다. 상처를 받아도 크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아주 건강하고 강한 영혼과 내면을 지닌 사람이 됩니다. 둘째, 그래서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일어서거나 걷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어났고 또 걸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사람을 회복시키고 치유해 주기 때문에 일으키는 또 다른 기적입니다. 정말과 좌절, 그리고 열등감의 사람이 자신의 어떠함에 개의치 않는 사람이 됩니다. 못한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않지만 할 수 있다고 교만해지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치유한 것이 은혜이고 그 은혜가 지금도 자신을 붙들어 주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눈에 보이는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참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면 그런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런 문제에서 그만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제가 이것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은혜의 주인공이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거의 모든 정서적인 문제의 덩어리 였습니다. 자신감도 없었고, 의지도 약했고, 상처도 잘 받았고, 또 상처 받으면 몇 날 며칠을 끙끙 거리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 화도 잘 내고 또 상처도 잘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모든 문제들이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제 아픈 다리였고 또 하나는 저희 가정이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으셨고 그래서 가정은 제 아픈 다리와 더불어 저를 심각하게 괴롭히는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정서적인 문제들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때까지는 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 다리나 저희 가정을 고쳐 주시는 대신에 은혜로 저희 마음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펴시고 힘이 없는 곳에는 힘을 주시며 약한 곳은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픈 다리는 더 이상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근원은 그대로 인데도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문제가 생겨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치료와 회복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오랫 동안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져 갔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 모든 문제들이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결정적인 치료가 일어난 것은 제가 하나님을 확실히 신뢰하게 되었던 때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그 순간을 ‘예수를 다시 믿기 시작한 순간’이라고 부르곤 하는데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통해 흘러들어온 강력한 은혜가 저를 획기적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근심 없이 살 수 있다,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정말로 믿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자주 말씀드리지요? 제 말씀이 빈 소리 같습니까? 아니면 진짜 같습니까? 제가 그것을 알고 하는 소리 같습니까? 그저 성경에 있으니까 하는 소리 같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저를 보시기에 제가 불안해 보이십니까? 아니면 굉장히 평안하고 편안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저에게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고, 근심거리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기 때문에 평안하고 편안해 보이고 실제로도 그런 것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자고 치면 걱정 안해도 될 일이 없고, 근심하자고 치면 한숨 나오지 않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흘러 들어온 은혜가 제 속 사람을 바꿔 놓으니 걱정을 할래야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두렵지가 않고 근심이 저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적어도 미래의 일 때문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하고 생각할 때, 자기 믿음에 걸맞는 정도만 일하고 생각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아주 멋진 말인데요. 그런데, 이 ‘믿음의 분량’은 우리가 은혜를 누리는 데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그저 막연히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경험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사람을 차별하십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은혜를 주시기 않으시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편협한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손의 크기가 다르니 주실 수 있는 은혜의 크기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큰 은혜, 그리고 놀라운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를 담을 그릇부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진짜 큰 은혜, 진짜 놀라운 은혜는 절대로 뜬금 없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담아낼 믿음이 있을 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라도 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애써야 하며, 항상 믿음의 성장해 가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크기와 견고함이 달라지면 분명히 여러분이 누리는 은혜의 크기와 그 능력 또한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새롭게 열리는 믿음의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면서 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 속에서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보셨을 때, 그를 고쳐주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데도 내 삶이 별 것 없는 것 같고, 때로는 식상하고 지루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원래 믿음이 줄 수 있는 의미가 그것 밖에 안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믿음이 그것 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쉽게 자기 자리를 바울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평생 단 한 번도 걷기는 커녕 일어서 보지도 못한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그들에게 그럴만한 은혜를 담을 믿음의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집착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 중 어떤 부분이 그 무엇에 단단하게 묶여 단 한 번도 걷고 뛰지 못했습니까? 이제 그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서 너그럽고 자유로운 삶을 살며 묶인 것에서 놓임 받아서 걷고 뛰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해답은 믿음에 있습니다. 그런 은혜의 역사들이 내 삶 속에 일어나게 할만한 믿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항상 믿음에 신경쓰며 믿음을 키워감으로써 그 믿음을 통해 주시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 가운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