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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11.18. 새벽예배 - 갚을지니라(출애굽기 79)






본   문 : 출애굽기 22장 01-15절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 필요합니다. 그 약속을 바로 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법은 누군가가 그것을 어겼을 때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그 사회 전체에 피해를 입히게 되기 때문에 그 피해에 상응하는 벌을 함께 정해 놓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율법도 일반 법률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일반 법률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사람이나 사회에 입힌 피해보다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댓가가 훨씬 적은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틈들은 사람이 만든 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이 법이라는 것이 때로는 오히려 힘있고 많이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더 많이 편들어 주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은 그래도 비교적 피해를 입힌 사람들 보다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편을 많이 들어주고 많이 가지고 힘있는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더 많이 고려해서 만든 법들을 가진 나라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법들을 할 수 있는대로 공평하게 적용하는 나라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비록 OECD국가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선진국이라고 불릴려면 갈 길이 아주 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철저히 피해를 입은 사람들 편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우리가 우리의 상식으로 바라보면 많이 과하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남의 소나 양을 훔친 경우에, 그것을 이미 잡거나 팔았으면 소 한 마리당 소 다섯 마리를, 그리고 양 한 마리당 양 네 마리를 배상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소가 그 가격이 더 비싸고 양보다는 훨씬 숫자도 적었기 때문에 소를 훔친 경우 그만큼 더 많이 배상해야 한다고 정하신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도둑질한 것이 아직 살아있는 상태로 그 사람의 손에 있으면 그게 무슨 짐승이든 두 배만 배상하면 되도록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자기 짐승을 먹이다가 일부러 자기 짐승을 풀어놓아서 다른 사람의 밭으로 들어가서 그 밭의 식물들을 먹게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자기 밭에서 나는 가장 좋은 것들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만큼 배상하도록 했고, 어떤 사람이 무엇을 태우려고 불을 놓았다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밭으로 옮겨 붙어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정당하게 배상을 해야만 했습니다. 분명히 배상해야 할 것의 양이나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경우에 최소한 피해를 입힌 만큼은 반드시 보상해주어야 한다는 원칙과 그렇게 입힌 피해의 고의성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 재산이 그 주인에게 가지는 의미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이 배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해자가 입은 피해의 양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질,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피해자가 당한 충격까지도 모두 고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 중요한 것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도둑이 집에 침입한 경우, 도둑이 어두운 밤에 들어와 격투가 벌어져 그 도둑이 맞아 죽으면 그 집 주인은 책임이 없지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그 흘린 피에 대해서 집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둑이라고 하더라도 밝은 대낮에 그를 때려 죽이는 것은 고의성이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또 이웃에게 돈이나 물건을 맡겼는데 그 사람이 도둑을 맞은 경우 그 도둑이 붙잡히면 두 배를 배상해야 하지만 도둑이 잡히지 않은 경우 그 집 주인은 재판장 앞으로 가서 그 일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 사이에 잃어버린 물건 때문에 갈등이나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방지하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이 분실한 것이라고 주장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말씀해 주셨는데, 둘 다 소유권을 주장할 경우에 둘 중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두 배를 배상하라고 해 놓으셨습니다. 이 법은 십계명 중에서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실제에 적용한 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게 해 놓으심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함부로 주장하여 빼앗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웃에게 맡겨놓은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혹은 도둑을 맞았을 때, 그 일의 처리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피해가 어떤 것이든 그것이 맡았던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면 그 때는 맡은 사람에게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빌려온 것이 원래 주인과 함께 있을 때 다치거나 죽으면 그 때는 주인에게 배상할 필요가 없지만 주인이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렇게 되었으면 꼭 배상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고, 만약 그냥 빌려온 것이  아니라 세를 주고 빌려 왔다가 똑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그저 그 세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규정해 주셨습니다. 


그냥 보면 이 모든 조항들은 그저 사람이 이런 저런 경우를 경험하면서 만들어낸 일반 사회법과 똑같아 보입니다. 아마 성경이 아니라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다면 이미 성경에서 이 말씀들을 읽은 사람들이 아닌 경우에는,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살펴 보겠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규정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저는 이 모든 내용들을 읽고 생각하면서 ‘존중’과 ‘상식’ 그리고 ‘정당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것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소유를 소중히 여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읽은 법들은 모두가 다 그러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굉장히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상식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소유를 귀하게 여기며 그것이 적어도 고의로 피해를 입힌 것이라면 손해를 입힌 만큼이 아니라 훨씬 많이 배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요. 우리가 앞 부분의 배상액에 대해서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어쩌면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상식에서 그만큼 멀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미 비상식이 상식의 자리에 들어가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살면서 그 세상의 사고방식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식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것은 부당하고 어떤 것은 정당한 것인지, 남의 행동은 어떤지 몰라도 나의 행동은 어떤지를 잘 살피며, 나의 행동이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또 피해를 입혔을 때는 정당한 사과와 보상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하며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많이 생각하면서 살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우리의 본능에 따라 움직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또 그 사람이 교회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마찬가지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 살면 그 사람은 아름답고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주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조차 알지 못하구요. 항상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소중히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나의 행동이나 선택이 혹시 다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소유에 손해나 상처를 입히고 있지 않은지도 면밀하게 살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나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와 손해를 입혔다면 그들의 손해가 다시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받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시면서, 그것을 상식으로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출발점이니까요. 


항상 이 세상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상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상식으로 지키며 살아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흔적들을 많이 남겨놓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