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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11.25. 새벽예배 - 정의를 굽게하지 말며2(출애굽기 83)






본   문 : 출애굽기 23장 6-9절





정의에 관한 율법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적인 영역에서나 사적인 영역에서나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는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 성품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정의를 이루시고, 또 정의를 통해서 사랑하십니다. 정의가 생략된 사랑이란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이며,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정의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꾸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취향대로 만들어낸 하나님이 되니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요구는 바로 법정에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내용인데요. 하나님께서는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는 우리 사회와 같은 분위기에서는 너무나 어색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부자이고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가 관련된 재판에서 그 사람의 편을 들어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면 안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도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법적인 판결만큼은 정말 공명정대하게 내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지킨 일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정확히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라든지, 아니면 ‘그 행위대로 판단하는 분’이라는 말을 자주 발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분이시며, 그래서 진짜로 그렇게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은 이 세상과 우리 인생의 최후의 재판관으로서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며, 잘 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이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꾸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상벌은 굉장히 정확하고 공평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해서 정직하고 올바른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도 기울어지지 않은 판단력을 지녀야 합니다. 가족이라고, 친한 사람이나 고향사람이라고, 또 내 이익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옳다, 좋다 하지 말고 좋은 것은 좋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이 나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판단만큼은 정직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작은 재판관로서의 우리의 책임이자 올바른 모습일 테니까요.


그 다음에는 “거짓 일을 멀리하여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라는 율법이 이어집니다. 거짓 일을 통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 또한 법정에서 일어나는 옳지 못한 일입니다. 법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로 악한 일이지요. 송사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서도 안되지만, 반대로 잘못한 사람, 그렇지만 힘있고 가진 사람을 살리거나 유리하게 하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고 불리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재판관은 법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법을 그런 식으로 불의하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의를 세우라고 그에게 주신 힘이 그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힘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힘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유리한 대로, 자기 유익을 위해서 그 힘을 사용합니다. 힘이 있으니 그렇게 해도 당장은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누구든 하나님 앞에 섭니다.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따지시고 평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또 하나님의 재판장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판관이 되실 것이고 우리는 그 분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불의하게 사용하도록 만드는 가장 치명적이고 강력한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물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다음에 뇌물의 문제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그 누구도 물질의 힘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 그 올가미 속에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그 올가미를 잡아 끄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불의한 사람에 대해서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구요. 또 그래서 의로운 사람들의 정직한 말을 굽어지게 만듭니다. 물질을 제공한 사람의 편을 들어 주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반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게 눈을 어둡게 하고 말을 변하게 해서 힘이 정직하고 바르게 사용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는 중에 정의는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분명히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사람들, 불의하게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평과 정의를 위한 율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이것은 22장 21절에서 이미 한 번 말씀하신 것인데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말씀을 또 한 번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기는 고아나 과부와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족들도 아니며, 또 정통 유대교인도 아니었으니까요. 만약 어떤 사람, 특히 재판관이나 힘을 가진 사람이 가장 취약한 사람, 전혀 동족도 아니어서 보호해 주고 챙겨주어야 할 의미나 필요조차 없는 사람을 바르고 공평하게 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대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재판관들에게 이방 나그네들까지 정의롭고 공평하게 대해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장 낮은 사람을 사랑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면 모두를 공평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가장 쉬운 사람을 정말로 존중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정의롭고 공평하라고 하신 모든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일들과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대하고 또 판단함으로써 나중에 우리의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이 우리의 바른 삶으로 인해 더욱 더 영광스럽고 의로운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