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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1.09. 금요기도회 -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함이라(사도행전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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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5장 12–21절




예수믿는 사람들은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고집, 자기가 확신하는 것들에 대한 고집, 그리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을 단단하게 붙들 수 있는 고집 등등… 성도가 참된 믿음을 유지하고 또 성장시켜 가려면 반드시 쉽게 흔들리지 않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붙들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일단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보면 고집이 더 센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고집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집과는 전혀 종류가 달라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의 고집은 그 사람의 안에서부터 나옵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경험이 기준이 되어서 생겨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집은 그 사람의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집하는 것이고, 그 분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고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고집이 이렇게 그 출처가 다르기 때문에 그 고집이 내려놓아지거나 포기되어질 때도 전혀 다른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일반적인 고집은 처음 그 고집이 생겨났을 때와 똑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변화되거나 혹은 포기되어집니다. 이전의 고집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거나 또한 그와 반대되는 경험을 반복해서 하게 될 때, 다른 모양으로 수정되거나 아얘 다른 것으로 대체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충분하게 하기 전에는 왠만해서 고집이 포기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집은 처음에 그렇게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변하거나 포기되어지는 과정도 다릅니다. 성도의 고집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서 생겨납니다. 그게 제대로된 깨달음이든 아니면 잘못 깨달은 것이든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우리의 깨달음은 그것이 비록 말씀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생각하던 것이 아무리 맞다고 생각되더라도 더 바른 것, 더 확실한 것을 알게되고 발견하게 되면 예전에 고집하던 것은 포기되어져야 하고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은 더욱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성경 자체가 그런 책입니다. 성경에서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속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들은 변함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리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그림자이고 신약을 그 그림자의 실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구약은 그것 자체로도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이지만, 신약과 비교해 보면 본체의 그림자에 해당되는 희미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은 원래부터 신약성경이 주어진 후에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그 뜻을 알려주는 부분이 있을 때는 구약 자체가 아니라 신약의 가르침을 통해 다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한계가 있는 책이 바로 구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다면, 그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그 이해 위에서 생겨난 우리의 신앙적인 고집들도 변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변화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이 전부 다 맞다거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을 확신해서는 안된다는 말하고는 다른 말입니다. 확신하고 신뢰하되 더 정확하고 더 온전한 의미가 깨달아지면 예전의 것을 계속해서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저 자기 생각 포기하기 싫어서 말이죠. 


이방인 선교에 대한 바울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만 듣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의 경우와 똑같이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가 있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를 믿게 된 어떤 사람이 그래도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받게 하고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사도들이 모여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이번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사도인 베드로가 일어나서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했습니다. 세상에 성령충만함을 덧입은 것보다 온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있느냐고, 어떻게 우리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율법을 이미 구원얻은 것이 분명한 이방인들에게 짐지우려고 하느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줄을 믿노라”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경험한 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른 경험을 통해서 똑같은 것을 얻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그렇게 탐탁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게 되지요. 그 바리새인과 같은 입장에 섰던 사람들은 바로 이 함정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구원을 얻는 데는 복음을 믿는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부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들도 지지 못한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려는 어리석고 완고한 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뒤를 이어서 다시 한 번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해 이방인들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표적과 이사는 단순히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장소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게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백성이 되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 중에도 임하였다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이번에는 야고보 사도가 일어섰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두 명 중 하나였는데요. 그래서 야고보의 이야기는 마지막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베드로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 적도 없고,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것을 목격한 적도 없습니다. 그도 율법을 붙들고 살다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구원을 얻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조건으로만 본다면 야고보는 베드로와 바울의 주장에 반대할 가능성이 훨씬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당연히 두 사람은 긴장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여기서 야고보가 무엇을 기준으로 놓고 있는지 보이시지요? 야고보는 자기 경험이나 자신의 고정관념, 그리고 자기의 확신을 기준으로 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유대인입니다. 나면서 부터 철저히 유대인으로 살았고,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끊임 없이 듣고 또 들어왔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꼭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이외에는 해 본적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것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는 오래 전에 배웠던, 어쩌면 그 때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성경말씀을 생각해 내고는 그것을 기준으로 놓고, 베드로의 이야기를 그것과 비교해 보고서 그 두 가지가 일치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생각해 낸 하나님의 말씀은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것은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아모스 9장 11절과 12절을 인용한 것인데요. 그 앞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방나라들과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심판의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잃어버리고 이방인들과 똑같은 처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한 번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영적으로 볼 때, 누가 누구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똑같은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면 그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모든 이방족속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인데, 결국 이것은 그 때가 되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예수님께서 이미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던 다윗과 같은 메시야이셨으니까요. 그러니, 그 때는 이미 유대인, 이방인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성령충만함을 받은 그 사건은 아모스서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다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누가 옳으니 누가 그르니 하면서 논쟁할 문제가 아니라, 그저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그대로 인정하는 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기 모인 사람들에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야고보가 자기 의견을 정하는데, 전혀 자기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일들이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시는 이유를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것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다른 것들을 다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심지어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도 성경을 자신의 머리로 평가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쯤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이 있겠느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이런 모습들은 우리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성경에 나와 있는 성도가 사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 설교자의 가르침이 성경과 전혀 틀리는 것이 없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예배당 안에 앉아있는 모든 성도들이 설교자의 말을 전부다 그렇다고 받아들일까요? 들려오는 말씀들을 아멘으로 받아들일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들려오는 말씀을 자기 머리로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이것은 시대와 맞지 않는다, 이것은 내 취향에 맞지만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저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걸러낸 나머지만을 받아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취향에 따라서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리는 것은 절대로 우리들의 권한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의무 밖에 없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비현실적이라고,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심지어는 내 취향과 맞지 않는다고 먼저 잘라내면 절대로 안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대로 따르고 따르지 못하고는 그 다음 문제지, 그것 때문에 미리 하나님 말씀에 자기 마음대로 칼을 대면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이 됩니다. 제가 때로는 우리 성도들이 별로 관심이 없는 말씀도 자꾸 전해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고 여러분이 관심 있어 하는 말씀만 골라서 전한다면 그것은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을 그런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할 의무가 있고 여러분은 성도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말씀에 의지적으로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거기 있으니까 말이죠. 


이렇게 하는 일의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야고보가 아모스서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해 낸 일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아모스서의 예언은 로마의 식민지인 상황에서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 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불쾌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분명히 야고보에게도 그랬겠지요. 만약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가 그 전에 처음 그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미리 잘라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날 야고보는 그 말씀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그 소중한 역할을 해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거부하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은 정확하게 알아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이 내 취향과 맞든 맞지 않든,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달든 쓰든, 나를 기쁘게 하든 거슬리게 하든 하나님의 말씀은 일단 받아들이고 정확하게 알아놓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 안에는 우리가 몰라도 되고 관심 갖지 않아도 되는 말씀, 우리에게 필요 없는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이든지, 우리가 당장 어떻게 느끼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인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모든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말씀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또 선포되는 설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절대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수업시간에 집중도 하지 않고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고서 100점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일단 말씀을 소중하게, 그리고 아주 무겁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태도부터 바꿔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주시되, 이렇게 읽거나 듣다가 저건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는 말씀, 그래서 관심이 덜 가고 귀가 닫혀지는 말씀이 있다면 그런 말씀일수록 오히려 더욱 더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렵죠?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편식하는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고, 바로 그 부분이 항상 취약한, 그래서 그 부분에서 항상 넘어지고 쓰러지기 쉬운 그런 사람들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도 다 기억할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기억 속에만 담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시고 귀를 기울이신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들을 여러분의 영혼 속에 새겨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정말 중요한 문제를 판단하고 정리하는데 있어서 자기 생각이나 경험, 취향이나 감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철저히 그것에 따라서 판단하고 또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결정적인 역할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느라고 고집을 부리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말이죠. 


모든 말씀이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저 그 말씀을 담는 그릇이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진리가 가득 담겨지게 되어서 언제나 더 올바르고 더 분명하게 새로워져 가며, 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바른 곳에 서 있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