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1.18. 주일오전 - 예배하는 자는 3(2015년 신년 3)



20150118SM.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13-24절





      그 대상이 무엇이든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자동적으로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본질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본질을 붙들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본질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 진짜가 아닌 사람들이라는 것이 드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나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머뭅니다. 그렇게 해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거리낌이나 불편함이 없이 같은 원 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참된  선생님이냐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제자들을 사랑하는 선생님,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선생님,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대해서는 확실한 실력을 갖춘 선생님, 정직한 선생님 등등 정말 여러가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다 맞는 말이죠. 그런 스승들이 참된 스승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이야기가 꺼내지는 순간 그것이 진짜와 가짜를 나눠 버립니다. 가짜를 골라내자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진짜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꺼낸 이야기인데 본의 아니게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아! 나에게는 이런 점이 부족하구나. 내가 진짜가 되려면 정말 멀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거기서 진짜의 길을 찾고 또 진짜가 되려고 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굉장히 불쾌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질을 다룬다는 것은 여간 까다롭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만약 어떤 일이 본질을 붙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그런 일이라면 어떤 부담이나 불편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하고 또 그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3주째 참된 예배와 참된 예배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째 주에는 진짜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서는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가, 참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자에게는 어떤 은혜가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고, 지난 주에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믿고 고백하면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그 아버지께 큰 기대를 가지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진리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자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과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에게서 가장 좋은 것들을 얻을 것을 확신하고 기대하는 자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당연히 예배자인 우리 자신과 또 우리가 그 동안 드려왔던 예배를 되돌아 보게 만드는데요. 이런 기준들을 통해 우리가 그 동안 드린 예배들 중에서 정말 그런 복되고 은혜로운 경험을 한 예배가 얼마나 되는지, 또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얻을 것을 믿고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드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도 아니었고, 또 참된 예배를 드리지도 못했었던 적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헛된 예배자로 산 시간이 훨씬 더 많았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그저 기분 좋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그렇지만 지난 두 주간의 설교는 우리가 시험을 친 후에 받아든 답안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또 그렇게 사용해야 합니다.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시험을 쳐도 답안지는 항상 학생의 틀린 것을 지적해 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기 시험지 위에서 보여지는 사선이 하나 하나 늘어 날 때마다 그 학생은 기분은 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모르는 것을 보강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스스로를 참된 예배자로 가꾸어 갈 수 있고 또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100점짜리 예배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만 치면 올백을 맞는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은 것은 용서하고 이해해 주셔도 완전함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는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아버지께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나아오는 그런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나오셨습니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부어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만나러 기쁘게 이 자리로 오셨습니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잘 챙기시고 예배드리러 오셨습니까? 또 잊으신 분들이 계시지요? 그래서 복습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따라해 볼까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다”, “예배자는 자녀다.” 한 번 더 해 볼까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다.” “예배자는 자녀다” 잊지 마시구요. 항상 이 관계 속에 머무시려고 애쓰시다가 예배를 드릴 때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그런 마음으로 예배드리러 오시기 바랍니다. 주리고 목마른 영혼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를 찾고 계시고 또 그런 예배자에게 예배의 참된 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 이것이 참된 예배자가 되는 첫번째 조건이라면, 그 두번째 조건은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전 성경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번역되어 있었는데요. 사실 이런 말로 되어 있으니 저런 말로 되어 있으나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그렇게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본문을 잘 들여다 보면 어렴풋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보입니다. 그래서 이 단서를 통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일단 이야기의 앞부분으로 가 보면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그리심 산이냐 예루살렘이냐, 하나님께서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를 받으시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둘 중의 한 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안타까워 하시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 할 때가 올 것이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예배의 모든 것을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형식적인 조건을 맞추는 일에 예배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장소, 그러니까 일단 예배의 형식적인 조건은 진짜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첫번째 말씀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디서 예배드려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께서는 그런 게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대상을 잘 알고 예배드려야 한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참되게 예배하는 자, 참된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은 예배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후에 주신 말씀들이니까 22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들은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대한 것, 예배자의 내면적인 조건들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 조건이 바로 예배는 자녀가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에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바르고 친밀한 살아있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 관계가 제대로 되어 있기만 하면 다른 것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게 하는 두번째 조건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씀은 뒤로 좀 미뤄놓고 우선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는 조금 복잡해 지니까 집중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우선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요.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이죠? 진리는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23절의 진리라는 말과 22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연결되어지지 않습니까?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배자로서의 사마리아인의 문제는 자신들의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은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마리아인들 보다는 나은 자리에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그래도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반드시 진리로,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배자가 그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도 제대로 모르는 것을 문제 삼고 계시니까 이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과 약속하신 메시야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체를 종합해 보면 누군가가 참된 예배자가 되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 하나님을 약속하신 구세주를 보내주시는 분으로 알고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예배드리는데, 이 복잡한 것을 꼭 알아야만 참되게 예배드릴 수 있느냐고 질문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적어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복음의 시대에는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시켜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을 얻는 하나 밖에 없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해 주시는 은혜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하나님께 받아 들여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 무엇하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을 빼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언제든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고급음식을 먹는 일도 별다른 의미날 만족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삼시세끼 밥을 먹는 일도 참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격도 느낄 수 없고 별다른 기대를 가지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특별하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회를 얻었을 때는 그것에 대해 느끼는 기쁨도 기대, 그리고 만족도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었고 그 분께 기도를 드리거나 혹은 그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목숨을 내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또 그 예배를 통해 그 모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항상 기억하며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통해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 안에서 예배드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이 우리에게 그렇게 특별하고 귀하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뒤로 미뤄 놓았던 ‘영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되고 또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게 하려면 우리가 반드시 ‘영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한 쪽이 자신을 열어 놓고 진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갈 때, 다른 한 쪽도 똑같은 마음과 태도로 상대방을 향해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야, 두 사람은 서로를 진짜로 만나고 의미 있고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참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다가 오십니다. 전심을 다해서, 전혀 숨기거나 가리는 것이 없이, 불순한 의도가 없이,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다가 오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영이시고, 빛이신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우리를 향해,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사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예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까요? 어떤 마음과 태도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까요?


    잠시 구약의 대제사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특권을 가졌던 동시에 아주 무거운 의무도 지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죄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속죄를 위한 제사를 먼저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로 지성소에 들어가면 생명을 잃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제사를 드릴 때, 적당히 거룩한 척하고 적당히 문제 없는 척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고 진지하지 않은 모습으로, 마음을 쏟아놓지 않고서 제사드릴 수 있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제사가 자기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데 그렇게 했을 리가 없지요. 아마도 모든 죄를 다 기억해 내려고 애썼을 것이고, 자신의 영혼의 속까지 들여다 보며 그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의 죄까지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을 것이며, 자신의 인격과 감정, 그리고 생각 등… 내면의 모든 것들을 투명하게 다 드러내 놓고 최고로 진지하게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저는 이들의 모습 속에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 그것은 자기 중심의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자기 중심의 모든 것을 기울이면서 또 가장 정직하고 투명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영을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최소한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우리와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게 할 수도 없고, 또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는 은혜를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그렇게 더디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예배는 드리지만 영으로 예배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영으로 만나고 또 예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과 교제가 주는 풍성한 은혜가 그렇게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원래 그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서도 죄인으로 멸시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아무도 없는 뙈약볕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까지 나와야 할 정도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 여인이 갑자기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참된 기쁨이라고는 몰랐던 그 여인이 기뻐하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왜 이렇게 갑자기 변화되었을까요? 물론 그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이 그렇게 변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이 여인은 비로소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여인은 그럴 듯한 모습을 하고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자신이 그렇게 숨기고 싶어했던 죄와 그 죄의 이유가 되었던 속깊은 갈증을 모두 들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영으로’ 예수님 앞에 설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싫어서 여인은 예배의 문제라는 가장 거룩하고 신앙적인 질문을 던져서 또 한 번 자신을 숨겨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신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 그러니까 예배자로서 꼭 붙들어야 할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 여인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물동이를 그대로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갔다는 것 자체가 그 여인이 이미 참된 예배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여인의 행동 안에는 이미 참된 예배자가 누리는 기쁨과 만족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된 것과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모두가 다 예수님 덕분이라는 것! 항상 이 사실을 붙들고서 이 사실에 감사하며 또 거기에 의지해서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항상 정직하고 투명하게 모든 마음을 기울이며 우리의 중심을 모두 드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예배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꼭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 헌신해야 하고 그래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꼭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고 꼭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우리의 능력과 만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올 해는 우리 모두가 꼭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 예배자들로 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났던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