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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1.25. 주일예배 -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2015년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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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스겔 37장 01-10절



우리가 계속해서 예배가 우리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있지만, 사실 오늘날에는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 예배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일과 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의 비중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 중에서는 예배를 통해 얻는 은혜보다 홀로 경건생활을 통해서 얻는 은혜를 더 크게 여기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경건생활이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공동체의 종교입니다. 모임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임 중에 임하시는 분이시고, 백성들 중에 거하기를 즐거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혼자 있을 때에도 은혜를 주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도가 모여서 함께 예배드릴 때 주시는 것과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그 크기와 깊이, 그리고 풍성함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절대로 예배의 은혜와 영광을 놓쳐서는 안되고 성도는 절대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꼭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풍성한 은혜와 영광을 아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는 마지막 시간인데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핵심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하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배 안에는 예배를 이루고 있는 여러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예배의 중심에 놓여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설교라고 부르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전혀 이견이 없는데요.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보면 이것이 실제적으로도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다분히 예배자 중심의 예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감각이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요소들이 예배의 겉모양과 환경을 결정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에도 콘티가 있습니다. 분 단위 초 단위로 정해져 있는 순서가 있고 예배를 드리기 전 날 그 콘티에 따라 예배를 위한 리허설을 하기도 합니다. 또 목회자가 입는 옷을 코디하는 코디가 따로 있습니다. 코디가 오늘은 감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메시고, 포켓에는 하얀색 손수건을 꽂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 목사들은 그대로 따릅니다. 조명을 잘 받기 위해서 예쁘게 화장도 하지요. 예배음악도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좋은 곡들이 선정됩니다. 깊이 있고 은혜를 묵상하기 좋은 곡들보다는 멜로디가 좋거나 달콤한 감정을 만들어 주는 노래들이 주로 선곡됩니다. 오케스트라는 풀 오케스트라로 수 십명이 앉아서 그렇게 선곡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합니다. 찬양대석에는 각 도시 합창단의 최고 독창자들이 서서 감동적인 연주를 선사합니다. 그렇게 할 만한 여유가 안되서 그렇지 아마도 대부분의 교회가 이렇게 하고 싶어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예배에 나온 청중들의 감성을 움직이고 그 취향을 세련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찾고 또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애씁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렇게 해서 예배는 사람들의 사람들을 위한 노력들로 채워져 갑니다. 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게 도와주려는 선한 마음에서 생겨난 노력들이지요. 그래서, 이런 노력들 덕분에 예배자들은 아주 기분 좋게, 아무 불편함 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감성이 다시 회복되는 경험도 하고 세련된 음악으로 위로도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통해 별다른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볼 수가 없고 예배자들 또한 영광스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배에서 얻는 마음의 만족이 있지만 그저 그 때 뿐일 때가 더 많고 예배자의 영혼은 은혜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최고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려고 교회와 목회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오히려 예배의 영광은 희미해져 가고 있고 예배의 은혜 또한 풍성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매주일 이 땅의 흩어져 있는 교회 안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들입니다. 물론 예배의 은혜와 영광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꼭 그런 노력들이 예배의 예배다움을 방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통해 참으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예배가 참으로 예배다워지고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은혜롭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려면 이런 노력들이 아니라 다른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배를 위한 노력들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들에는 아주 커다란 결함이 하나 있습니다. 그 노력들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철저히 예배자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놓고서 이렇게 저렇게 조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사람 중심이 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가 사람을 위해서 조정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배자들이 예배를 은혜롭고 편안하게 잘 드리는 것을 예배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예배의 다른 요소들 뿐만 아니라 설교 또한 거기에 맞게 조율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예배에 있어서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비중은 당연히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기가 힘들어 질테니까요. 처음에는 이런 일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이것은 예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설교자도 청중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일으키는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사건들을 경험하는 일이 점점 더 드물어 지게 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통로가 되고 또 큰 능력이 될 수 있는지 기억조차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설교자도 청중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이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예배를 통해 일어나야 할 놀라운 사건들이 그만큼 더 희귀해 지는 악순환이 시작되게 됩니다. 


저는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리고 또 예배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예배를 통해 별다른 은혜와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예배에서 차지하는 설교의 실제적인 비중이 줄어든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의 다른 요소들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데, 반대로 설교는 약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결론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 부어지는 능력과 은혜가 적은 것은 단순히 설교를 통해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배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그 설교가 바로 예배의 핵심이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냐? 우리의 기도나 찬양대의 찬양이 아니라 설교를 예배의 핵심으로 보아야 할 근거가 있느냐? 당연히 있습니다. 우선 예배의 짜임새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그리고 구체적으로 주시는 것은 설교를 통해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기도도 드리고, 찬양도 드리고, 신앙고백도 드리고… 나머지는 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 밖에 없다면 그 예배의 중심에 말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증언들입니다. 


우선 우리가 함께 집중해야 할 곳은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정말로 믿으시지요? 그러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무에서 만들어 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라니 말입니다. ‘무’란 문자적으로는 그저 ‘아무 것도 없음’을 뜻하지만 사실 인간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라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도 ‘공간’도 없는 상태이고, 그것을 인식해야 할 ‘자기 자신’도 없는 상태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고 우리들도 없다는 뜻입니다. 애초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우리는 다시 무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며 또 허무함에 시달리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 덕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시 ‘없는 것’이 되지 않게 막아줄 수 있는 것, 계속해서 있게 해 주고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귀에는 태초에 온 세상에 울려 퍼지던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선포되고 또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번째로 함께 살펴보기를 원하는 말씀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언젠가 커다란 전쟁이 벌어졌던 에스골 골짜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쟁이 끝난지 이미 수백년이 지난 것같은 에스골 골짜기에는 망자의 유골들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 해골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에스겔의 눈에 들어온 망자의 유골에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살아있던 적이나 있었을까 싶게 죽음만이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질문하십니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은 분명치 않은 대답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그건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나를 대신해서 이렇게 명하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 너희 위에 힘줄을 주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날 것이다.” 에스겔은 그 해골들을 향해 그저 되뇌이듯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기 저기서 ‘뚜두둑, 딱딱, 딸그락, 탁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뼈들이 서로 짝을 맞추어 연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피부가 덮혔습니다. 그 광경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생기를 향하여 나의 말을 이렇게 전하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이번에도 에스겔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생기가 들어간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살아났을 뿐 아니라 예전처럼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숙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정말로 믿는 것입니다. 때로 설교자는 정말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 같은 상태의 성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텐데, 죽어 있어서 하나님 말씀에 반응할 능력조차 잃어버린 것같은 성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저런 영혼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어엿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까? 목사가 무슨 그런 믿음 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그런 성도들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할 때면 그런 불안한 마음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 매번 그런 생각들과 싸워야 하고 또 이겨야 합니다. 에스겔에게도 똑같은 싸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해야 하지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은지 너무나 오래되어 완전히 말라버린 해골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도 그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던 에스겔에게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만으로 해골이 다시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또한 하나님의 커다란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본다는 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게 해 준 소중한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에스겔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주신 환상이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짜로 일어나게 될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항상 영적으로 충만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지치고 탈진하기도 하며, 성도의 영광도 능력도 잃어버리고 의기소침해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말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맞는가 하는 회의적인 질문이 생겨나기도 하고, 더 심각한 경우에는 점점 더 영적으로 무감각해져서 은혜도 없고 소망도 없는 상태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 가기도 합니다. 영적인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열정도 없는 에스골 골짜기의 해골같은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이런 성도의 영혼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귀에 들려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방적으로 다시 살리시고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인자’ 그러니까 ‘사람’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 그러니까 사람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게 하시며, 그 말씀을 통해서 잠들어 있는 영혼, 병들어 있는 영혼, 심지어는 죽은 영혼까지 다시 회복시키시고 살리셔서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침체가 심할 수록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가 그만큼 더 힘들어 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내가 지금 들려 오는 말씀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 자체를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잘 들리지 않고 말씀에 관심이 없어질 때 일수록 더욱 더 말씀에 집중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에 생기를 넣으실 수 있고,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군대로 회복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만들어 낸 능력입니다. 우리를 있게 하고 더 제대로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우리가 심각한 영적인 침체에 빠져 있을 때, 다시 우리를 회복시켜 주고 다시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세우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또 하나의 아주 놀랍고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17절 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세세한 유익을 이렇게 잘 요약한 말씀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성경은 큰 틀에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세세하게 준비시켜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신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어있는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다른 책과 완전히 다른 점입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성경이 가짜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믿게 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이유는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불어넣어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 숨결이 그들에게 들어가서 죽어있는 그들의 영혼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성경은 그 성경을 믿는 자들을 가르칩니다. 모르던 것을 알게 해 주고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과 우리 자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둘째 성경은 책망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삶 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감정, 가치관까지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려주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래서 그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이 하는 일이 이것이 전부라면 성경은 우리에게 별다른 능력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입니다. 진리들을 가르쳐 주고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쳐 준 후에 성경은 우리를 실제로 바로잡아 줍니다. 바로 여기서 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성경은 우리를 속으로부터 바꾸어 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우리들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 관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갑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들을 찾아서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성경이 이렇게 놀라운 능력이 되는 이유는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이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기적은 성경을 사랑하고 또 온전히 믿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 하나가 그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이 책이 저절로 그런 일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이 책의 교훈과 진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진실로 믿을 때,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성경이 말해 주는 것들로 기꺼이 바꾸려고 할 때, 비로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속속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광스럽게 바꿔 주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런 힘을 가장 강력하게 발휘하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강단에서 선포되어질 때입니다. 그 때 설교자를 통해 여러분의 귀에 들려지는 말씀은 단순히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서 설교자를 통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여러분의 영혼에 깨달음을 주실 수도 있는데, 굳이 설교자에게 설교를 하게 하시고 또 청중들이 그 설교를 듣게 하신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설교는 직접적으로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 항상 이런 저런 오류가 끼어들 수 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도 설교가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가장 특별한 도구로 설교를 택하셨고 또 지금까지 그 방법을 고집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설교라는 방식 속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불완전함을 채우고도 남는 특별한 유익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설교는 ‘말’로 이루어 집니다. 그런데, 말 속에는 항상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와 그 사람의 인격이 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말이 듣는 사람의 귀를 울릴 때, 그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듣는 사람의 인격을 만나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란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인격의 만남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때 설교자의 인격이 실린 그 말을 통해서 청중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짜로 원하시는 것은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 말씀을 통해 알려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설교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설교자와 청중이라는 두 인격체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이고 인격적으로 전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온전하게 전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설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설교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말씀의 능력으로 새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는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하고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찬양대의 찬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정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예배의 한 가운데는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대화하시며 그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든든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합당한 아름다운 사람들로 빚어 가십니다. 그 말씀 속에 천지를 만드신 능력이 있고, 마른 뼈를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신 능력이 있으며, 우리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배를 드릴 때, 설교자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예배가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능력과 은혜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고, 하나님께서 진짜로 여러분에게 주시려는 것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올 한 해, 참된 예배자로 회복되어져 가실 때, 특히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좋은 청중으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일으키시는 새 생명의 기적들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복된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배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과 생각과 뜻을 다하여 귀 기울이게 하소서. 
  2. 올 한 해 말씀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온전히 회복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