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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2.13. 금요기도회 -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러1(사도행전 95)

20150213FE.mp3.zip





본문 : 사도행전 16장 11-15절



저는 서울 사람입니다. 저와 몇 마디 이야기만 나눠 보면 제가 서울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아실 것입니다. 제가 대구에 내려온 지 올해로 12년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 인생의 거의 4분의 1일 대구에서 보낸 셈인데요. 그러고 보니 제가 여기서 굉장히 오래 산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대구에 내려와 사역을 할 때, 제가 성도들을 만나서 제일 먼저 질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왜 대구에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네. 하나님의 인도죠. 뭐.”라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곤 했지만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제가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죠?”하고 말입니다. 저에게 그런 마음이 생겼던 것은 그 분들의 질문이 가지고 있는 속뜻 때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은 액면 그대로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왜 서울 사람이 좋은 서울 놓아두고 지방까지 내려왔느냐고, 왜 그런 어리석고 손해나는 선택을 했느냐고 하는 궁금증이 담긴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도들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무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같은 목회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했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목회자에게 당신이 거기 왜 있느냐고 묻는 것이 적당한 질문일까요? 왜 좋은 곳 놓아두고 여기까지 내려 왔느냐고 묻는 것이 과연 합당한 질문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목회 초년생 때는 제가 이리 저리 제가 일할 도시를 고르고 또 교회를 고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은 목회자가 가질 수 있는 생각 중에서 가장 온당치 못한 생각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가 있을 곳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이래서 안 되고, 저기는 저래서 안 되고, 여기는 이 조건이 부족하고, 또 저기는 저 조건이 부족해서 안되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대구로 와서 교회를 섬기다가 이제는 담임목회를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때까지 사실 저는 대구는 제가 담임목회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살아보니 저는 대구라는 도시와 정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저는 굉장히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인데 대구는 너무나도 보수적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사고방식이나 정치적인 성향이 저와는 정반대가 되는 곳이라는 것을 살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대구에서 목회를 하다가 보면 나도 불편하겠지만 자칫 성도들이 나를 오해하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했습니다. 대구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해서 제가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만드셨고 결국 제가 여기는 안된다고 말씀드렸던 그 곳에 저를 주저 앉혀 놓으셨습니다. 요즘도 서울 사람이 대구에 와서 목회한다고 하면 걱정스럽게 대구에 잘 적응은 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대답할까요?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아직도 대구에 적응이 안되었고, 또 대구에는 영원히 적응이 안 될 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대구에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 교회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대구에는 적응이 안 되어도 우리 교회에는 비교적 잘 적응이 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제가 대구에 적응이 안되어 있고, 영원히 대구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 뭐가 대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를 여기 두셨다면 저는 그냥 여기 있어야 하는 거죠.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서 일하는 것 밖에 다른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셔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는데, 비두니아로 가지도 못하게 하셔서 드로아로 왔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있을 때,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이리로 건너와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체없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직접 갈 수가 없어서 중간에 있는 사모드라게라는 섬을 거쳐서 네압볼리라는 마게도냐의 항구도시에 도착했고, 거기서 드디어 마게도냐 지역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가라고 인도하시고 환상까지 보여주신 마게도냐 지역의 중요한 도시에 도착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얼마나 기대했을까요? 그렇게 직접적인 인도를 받아 거기까지 갔으니 엄청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관에서 며칠을 묶어도 하나님의 그 어떤 인도하심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그냥 흘러가서 이제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인데 예배드릴 곳도 없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이 너무 적어서 유대인 성인남성 열 명이 모여야 세울 수 있는 회당도 없었고 그래서 기도할 곳이라도 찾을 겸 길을 나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재미있지요. 이것이 환상까지 봐 가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서 가라고 하신 곳에 도착한 하나님의 종들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무료합니까? 얼마나 할 일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순종하는 일은 결국에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수도 있지만 그 중간에는 그야 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허무하게 느껴질만큼, 무의미하게 느껴질만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해서 언제나 변함 없이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고 하는 일마다 주구장창 잘 풀리는 그런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그야 말로 그냥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가라는 데로 가고 하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간이 어떤 모양이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해 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하면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어슬렁 어슬렁 여관문을 나선 두 사람은 강가에 모여 있는 여인들을 보았습니다. 염색업을 하는 사람이 거기 끼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아마 그 여인들은 그 여인이 만든 천을 세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어디 기도할 곳이 없는가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전혀 낯선 곳에서 그것도 유대인 남자가 처음보는 이방인 여인들에게 말을 걸고 또 스스럼 없이 복음을 전하는 모습! 역시 바울이구나 했지만, 저는 이러한 바울의 모습 속에서 또 한 번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상황이나 장소를 탓하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자연스럽게, 마치 자신의 일상생활처럼 해 내는 모습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직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이 몸에 착 맞는 편안한 옷처럼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서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떤 상황,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든 하나님께서 저에게 시키신 일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유독 바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자주장사 루디아’라고 부르는 그 여인이었습니다. 루다아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회당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디아가 복음을 들을 때, 그 마음을 여셨고 그래서 그 때부터는 유대인들의 메세지가 아니라 바울의 복음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당연한 것이죠. 모호하고 완전하지 않은 것은 항상 분명하고 더 완전한 것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니까요.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전에 모호하고 분명치 않았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점점 더 명확해 지고 온전해 지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 안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야 하는 일이고 그래야 우리가 따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버리고 따라가야 할 것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신앙 안에서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지요? 절대로 그 일이 멈춰지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말씀을 듣고 배울 때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참 진리를 믿고 따르는 변화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마음으로 복음을 들은 루디아는 그것이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100퍼센트 순종했지요. 루디아는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바울은 거기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집안 사람 모두가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 또한 우리들의 또하나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나로 인해 우리 집안이 모두 예수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우리 식구 모두가 참된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아직도 이뤄지지 않아서 많이 지쳐 계실지도 모르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식구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적어도 그 중에서 믿기로 작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시며 가족들을 위한 작은 중보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된 루디아, 바울이 우연히 만나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된 루디아는 그 이후에 바울의 그 지역의 사역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인이 됩니다. 가족들이 세례를 받자 루디아는 만약 나를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신다면 그렇게 해 달라고, 거절할 수 없는 청을 해서 떠나려는 바울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아직 나오지는 않지만 빌립보에서 옥에 갇혔다가 나왔을 때, 다시 루디아의 집으로 갔던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루디아는 바울과 일행의 후견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들이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상황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당시 기록을 보면 길거리에서 함부로 전도를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즉각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바울은 각 도시를 다닐 때마다 그 도시에 있는 회당을 찾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야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할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고,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빌립보에서는 변변한 회당하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으니 머물 곳도 마땅치가 않았던 것은 당연하구요.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도시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루디아가 복음을 믿게 하셨으며 그 가족 전체가 그 지역 전체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바울과 일행의 든든한 후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집을 복음전도의 본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14절을 보면요. 성경은 루디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 루디아는 재미있게도 이 여인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습니다. 대구에 광주여자분이 와서 살면 뭐라고 부르죠. 광주댁이라고 부르죠. 마찬가지입니다. 루디아는 사실 지역이름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타지에 와서 사는 고대 루디아 왕국 출신 사람들을 다 루디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루디아 댁’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루디아가 나중에 빌립보서에 나오는 중요한 여인들, 그러니까 바울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라고 표현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루디아가 빌립보를 떠나지 않았고, 또 계속 바울과 관계를 이어 갔다면 루디아 또한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보에서 맺혀진 복음의 첫 열매, 그리고 장차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후견자가 되어줄 루디아를 그런 식으로 만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님의 기가 막히는 섭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말에 대해서 낭만적인 기대를 가지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만 하면 만사형통,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정말로 기가 막히게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칠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하게 인도해 가시는데, 우리는 자꾸 특별한 일을 기대하니까요. 분명히 평범한 인도 가운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일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인도가 숨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보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는 것은 모두가 다 누릴 수 있는 은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정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경험하려면 그 사람은 진짜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아무 계획이나 전제 없이 마게도냐로 떠났던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말 그대로 무조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로 막는 것은 우리의 전제나 우리의 생각들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을 기가 막히게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 과정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숨을 잃을 뻔한 두아디라 지역으로 가서 거기서 교회를 돌보다가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전제없이 도착했던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다 부르심과 과정에 충실했기 때문에 만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 덕분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소중한 일들을 더욱 더 영광스럽고 풍성하게 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는 그런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변함 없이 우리들을 인도해 가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섭리해 가고 계십니다. 그런 시간에 여러분이 하는 일이,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이고, 또 여러분과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들 중에서 어떤 것이,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누가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될 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은혜는 너무나 평범해서 무시하기 쉬운 시간들과 사람들 속에 숨겨진 보석처럼 놓여져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시간과 일 속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또 여러분에게 만나게 하시는 그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평범한 것들을 특별하게 사용하실 때, 그 유익을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