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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3.06. 금요기도회 - 주 예수를 믿으라(사도행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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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6장 25-34절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불쌍한 한 여인에게서 악한 영을 내 쫓아 주었습니다. 둘 다 참 선한 일이고 또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악한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그 여인을 통해서 금전적인 이득을 얻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들이 행한 선한 일로 하나님께 칭찬받고 영광을 얻는 대신에 모함을 받아 흠씬 두들겨 맞고 또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못 견디어 하는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죄를 짓거나 욕심을 부리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래도 그 일을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처럼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고, 게다가 전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데 이런 억울하고 말도 안되는 상황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당한 일의 괴로움보다도 그 일의 부당함 때문에 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고통에 분노와 억울함까지 더해져서 굉장히 과도하고 거친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주 금요일에도 보았듯이 바울과 실라는 그런 상황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울거나 화를 내고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많이 두들겨 맞아서 몸은 여전히 욱씬 욱씬 쑤시고 발은 착고에 메여 있는데도 말입니다. 두 사람의 이러한 반응은 우리를 많이 놀라게 합니다. 이런 반응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반응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상식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놀랍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이런 반응에 대해서 그렇게만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과연 신앙적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상식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똑같이 걱정합니다. 근심거리가 생기면 똑같이 한숨을 쉬구요. 현실에 대해서 똑같이 두려워 하기 때문에 똑같이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 상식적인 것이니까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과연 이런 반응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할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 속에는 어떤 문제가 없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다름은 어디에 있고 그 믿음의 능력과 유익은 무엇입니까? 믿는 우리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 수준에 머물게 하고 그들과 똑같은 반응만 하는 수준에 머물게 한다면 믿음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 주고 있습니까? 


두 사람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며 찬양했을 때, 그 감옥 속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의 터가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또 손과 발을 묶고 있었던 모든 것이 다 벗겨져 나갔습니다. 본문만 보아서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했기 때문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묶여있던 모든 것이 풀려졌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본문은 그냥 그런 사건들을 줄을 지어서 주욱 일어난 사건들이라고만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두 사람이 기도하고 찬양했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난 것만큼은 틀림이 없는데요. 성경에서 지진은 거의 항상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있을 때, 그것을 알려주는 전령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자연현상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기도와 찬양을 듣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오셨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옥 문이 열리고 묶었던 것들이 끊어져 나가는 것 자체는 본문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그래서 두 사람이 풀려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 간수도 죄수들도 감옥에 갇히면서 그런 반응을 보이고 그렇게 즐거워 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래서 너무 많이 맞아서 억울해서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기도와 찬양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에게는 무언가 보통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지진이 납니다. 마치 그 기도소리와 찬양소리가 땅을 흔드는 큰 파장이 되어 지진을 일으킨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놀랐겠지요? 죄수들도 놀랐겠지만 아마 간수는 더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옥문이 열리는 일보다 더 큰 위기는 간수에게 없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자다가 깬 간수는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에 놀랄 겨를도 없이 그저 옥 문이 열린 것만보고 죄수들이 탈줄한 줄로 알고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 로마 법으로는 죄수가 탈출하면 간수가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때, 바울과 실라가 우리가 다 여기에 있다고 말하면서 간수의 자결을 막았습니다. 


간수는 등불을 들고 옥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옥에서 데리고 나와 물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래서 바울과 실라도 간수에게 가장 복된 대답을 들려 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참 은혜롭고 아름다운 대화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대화, 특히 간수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 보았듯이 빌립보 사람들은 죄용서를 받고 영생을 얻는 구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어려운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나 적극적으로 말하면 현실적인 복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수의 이 말을 너무 영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간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갑자기 윗 사람이 이유도 가르쳐 주지 않고 죄수 둘을 맡깁니다. 단단히 지키라고 당부까지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이 두 죄수는 들어오자 마자 다른 죄수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하고 찬양을 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잠시 잠이 든 차에 갑자기 지진이 나서 깨어 보니 두 사람을 가두었던 옥 문이 열려 있습니다. 보통 같으면 당연히 두 사람은 사라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전히 거기 있었습니다. 도망가지도 않고,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두 사람은 옥을 탈출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여전히 옥 안에 있으면서 자기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간수에게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상황을 야기시킨 두 사람에게 그런 혼란스럽고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면 되겠느냐고 답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간수가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의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진짜 의미에 가까울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는 자신이 지금 처해 있는 혼란과 현실의 어려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해결방법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죄 용서를 받고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간수의 질문에 대해서 동문서답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헬라의 문화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수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었지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간수에게 그저 그가 물어오는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방법만을 알려주고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는 구원의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간수 한 사람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구원에 대한 복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두 사람은 간수에게 간수와 간수의 가족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해서만 알려 준 것일까요? 두 사람의 대답 속에는 혹시 간수가 물었던 질문, 현실적인 문제들과 혼란스러움에서 건짐을 받는, 그런 구원 방법에 대한 대답도 들어있지 않았을까요? 사실 우리가 구원이라는 말을 영혼구원과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풍성한 의미와 은혜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누가복음 8장 40절 이하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서 깨끗하게 치료받은 사건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계시는데요. 이 ‘구원’이라는 말은 영혼 구원은 물론이고 그 여인이 앓고 있었던 질병의 치료까지고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힘들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지 못하게 가로 막는 모든 속박들이 깨어져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한 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사실 그 영혼이라는 것도 한 사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육체와 구분되는 인간의 다른 부분인 영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혼만 구원하는 구원은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는 없습니다. 


간수는 자신이 당장 그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그것을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두 사람의 모습과 그렇게 옥 문이 깨어져 나갔는데도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남아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압도되어서 간수는 두 사람에게 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대답합니다. “네, 당신이 말하는 그 현실적인 혼란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은 물론이고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믿는 한 가지 일에 모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 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집이 당신이 얻게 될 구원과 똑같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두 사람이 간수에게 한 대답의 진정한 의미였고, 분명히 두 사람은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육체도 구원하십니까? 육체도 구원하시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생에만 관심을 가지실까요, 아니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우리의 삶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혼란과 갈등, 어려움과 고난, 아픔과 슬픔, 그리고 속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허무함과 외로움에서도 우리를 건져 주실까요?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와 욕심, 뿌리깊은 이기심과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그런 것들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고 또 구원해 주실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구원이니까요.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말 남다른 반응을 했던 이유. 그것은 지난 주 금요일에도 살펴 보았듯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신뢰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 확신말고도 더 크고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라”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줄 가장 완전한 구원자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을 드릴 수 있었고, 그래서 다시 한 번 감옥을 깨뜨리시는 구원자 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만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삶과 현실의 모든 부분 부분을 다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모든 일에 있어서 충분하고 완전하신 구원자로 정말로 믿고 그렇게 의지하면 그렇게 되어주시는 그런 구원자이십니다. 본문의 결론을 보겠습니다. 어떻게 되었지요? 결국 그 간수의 집안이 전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을 볼까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에 대해서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진짜 결론은 큰 기쁨입니다. 이것이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던 간수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와 그 집안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한 사람의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한 집안의 위기는 주 예수를 믿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상은 알 수 없는 큰 기쁨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얻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영혼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큰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과 그 안에 속한 모든 일에 있어서도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서도 한 분 밖에 없는 우리 구세주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로서 그 구원을 누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까지 나의 구원자 되어 주심을 실제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얻은 자에게 주시는 참 기쁨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구석 구석을 달라지게 하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른 반응을 보이게 하고 또 다른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우리 자신이든 다른 사람들이든 누구를 향해서든 ‘주 예수를 믿으라’고 분명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사람들이 찾고 기대하는 구원 이상의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이 들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흔들릴 때마다 반복해서 여러분의 영혼을 향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있는 방황하고 흔들리는 사람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든 주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이상의 구원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그러셨듯이, 그리고 간수에게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항상 우리의 삶에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주로 믿고 참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자들이 늘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