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3.13. 금요기도회 - 위로하고 가니라(사도행전 98)

* 녹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음성녹음 파일은 올리지 못합니다. 



본문 : 사도행전 16장 35-40절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억울하게 두들겨 맞고 감옥 갇힌 일은 결국 그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 전부를 구원하는 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지진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렸고 또 거기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갇혀 있는 감옥의 터를 흔드시고 옥문을 열어 젖히신 사건을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두들겨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일으켜 그 감옥을 흔드시고 옥문을 열어 젖히셨습니다. 손발을 묶고 있는 모든 것도 다 풀어주셨구요. 그렇다면 이 일은 무엇을 뜻할까요? 대개가 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 “아! 내가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당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랍게 풀어주시는 구나. 역시 우리 하나님 대단하시다.”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다. 당연히 이성이 있는 사람의 생각은 그런 식으로 모든 상황들을 연결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상식이니까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 일을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 마땅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이 상황이 자신들을 탈출시키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열려져 있는 옥문을 바라보면서도 그저 가만히 감옥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상황 속에서 간수가 던지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묻는 질문을 듣고는 지금까지 거기서 벌어진 기적들이 자신들을 탈출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수와 간수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간수와 그의 가족들 전부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벌어진 상황을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해석하고 또 반응했다면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간수의 가정도 커다란 불행에 빠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분별력과 순종 덕분에 그 모든 불행한 일들을 방지할 수 있었고, 한 가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면서 상식적인 판단과 상식적인 선택을 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헤아려진 뜻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분별력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렇게 한 가정을 구원한 후,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도망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간수의 집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처음에 있던 그 자리로 되돌아 갔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두 사람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고 그래서 단순히 지금 내가 어디에 어떤 상황 속에 있는가 하는 것에는 그다지 큰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간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간수에게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까요. 이것 또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기 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또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입장을 먼저 헤아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가장 기뻐합니다. 그렇게 변화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이렇게 변화되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유는 죄 때문에 망가지고 잃어버린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한 것인데, 원래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또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막상 개인적인 삶의 행복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거의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를 먼저 챙겨야만, 심지어는 나만 챙기면서 살아야만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나’와 ‘남’의 행복이 함께 공종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참된 행복이 실은 남의 유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진지하고 진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행복은 나만 챙기고 나만 생각하며 사는 삶에 있을까요? 그렇게 살면 우리는 정말 행복하고 정말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은 정말로 검증된 생각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생각에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도 수 없이 보셔서 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도, 자발적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얼굴이 어두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만 생각하고 또 자기만 알고 살아가는 사람치고 그 얼굴에 벅찬 행복과 기쁨이 흐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삶에서 참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말이 과히 틀리지 않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리고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겉으로 보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가 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 삶의 참된 행복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편하기는 합니다. 쾌적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가 장담하건데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람답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답게 사는 사람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살라고 하시는 것.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것 자체가 올바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불행한데, 그저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야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기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까지 부어주시면서 우리를 다시 만드시고 꼭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어서 전혀 거기에 관심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되는 일은 피할 수가 없지만 그 일은 동시에 우리의 행복과 영광스러운 삶을 위해서 생략할 수 없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아침에 되어서 전 날 어쩔 수 없이 바울과 실라를 때리고 감금했던 관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이제 바울을 놓아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바울이 입을 열어 자신들은 로마사람들인데 재판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때리고 가두더니 이제와서 이렇게 조용히 놓아주려고 하느냐고, 놓아줄려면 직접 와서 데리고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관리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두 사람이 로마인이라면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을 대접한 것은 단지 두 사람이 아니라 로마시민 전체와 로마법에 대한 대죄를 지은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감옥으로 와서 두 사람을 조용히 데리고 나가서는 간곡하게 그 도시에서 떠나달라고 부탁합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왜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바울이 그 시점에서 굳이 자기가 로마인이라는 것을 밝혔을까요? 자기를 그렇게 만든 관리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면 정식으로 고소했겠지요. 그래서 여기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이 관리들에게 했던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그냥 걸어서 감옥을 나간다면 그 다음 상황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을 발견한 빌립보 사람들 때문에 또 한 번의 소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요청은 그런 소란을 막기 위한 보호요청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히려 모든 일을 조용히 마무리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신가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입어도 그것이 또 다른 악으로 이어지는 것을 가장 싫어 합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실정법을 어긴 문제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당시의 법의 호소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법 또한 이 세상을 질서있게 유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니까요.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적어도 그 고통이나 고난이 복음이나 믿음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나 복음은 지극히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서 생겨난 어려움이 악한 일로 연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또 다른 피해자나 혹은 소란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또 하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화평을 만드는 자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에서의 마지막 행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두 사람이 감옥에서 나와서 향한 곳은 바로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그것은 루디아의 집이 두 사람이 빌립보에 머물며 전도하는 동안 하나의 교회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그 곳에 가서 형제들을 만났고,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문득 수요일 저녁에 함께 공부했던 고린도 후서의 말씀이 생각나서 하나님 말씀의 정확함에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고린도 후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마치 고린도 후서의 말씀은 오늘 말씀을 다른 말로 표현해 놓은 듯합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울과 실라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두 사람이 빌립보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마치 성령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환란 중에 받았던 하나님의 위로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주신 위로와 격려가 능력이 되어서 두 사람의 고난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있던 빌립보의 형제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나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분명하게 위로해 주십니다. 이 위로는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고통 당하고 고난 당하는 자들의 마음에 주시는 특별한 영적인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은혜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위로는 그런 힘겨운 상황 속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모양으로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도우시고 또 건져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에 그 경험은 말할 수 없이 능력있는 위로가 되고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유익은 그런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유익은 그들이 속한 몸된 교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빌립보의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안 두려움과 근심 속에 있었던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크게 위로를 받았을 것이며, 얼마나 생생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채워지게 되었을까요? 오히려 두 사람이 그런 환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런 위로와 확신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실 때, 거기에 어둡고 불행한 결과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잠시 동안의 어려움을 당할 수 있지만, 그 어려움은 오히려 그 당사자에게도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해 주고 하나님을 더욱 더확실하게 붙들게 해 주는 역할을 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똑같은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며 그들에게 믿음의 이유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통로가 됩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힘으로 때리면 맞을 수 밖에 없고 가두어 두면 갖힐 수 밖에 없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런 한 사람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약하고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통해서 주변에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고 싶어하시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십시다.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자신을 위한 최고의 행복과 기쁨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언제나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시되 그와 같은 지혜롭고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실 것이며, 이웃을 살리고 우리를 더욱 든든하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때로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게 되더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로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믿으며 참된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