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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3.27. 금요기도회 -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사도행전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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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7장 10-15절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무리들과 귀부인들의 상당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 있었던 유대인들은 굉장히 거칠고 난폭해서 바울 일행을 해치려고 했고, 그래서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밤을 틈타서 세 사람을 거기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라고 하면 예전에 우리 나라에 이 베뢰아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단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별로 느낌이 좋지 않지만, 원래 이 베뢰아는 적어도 바울의 선교 중에 들른 도시들 중에서는 복음에 대해서 가장 바람직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 사는 도시였습니다. 갈라디아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믿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바울 일행을 해치려고 했고 시정잡배들을 동원해서 거짓으로 야손과 형제들을 감금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거기서 멀지 않은 베뢰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들 중에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인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그 중에 믿는 사람들’ 속에는 유대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서도 회당의 터줏대감인 유대인들이 바울이 계속 복음을 전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왜 이 도시의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였을까요? 특히 이 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과 비교해서 무엇이 어떻게 달랐을까요? 분명히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는 절대로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11절을 보시면 바울이 베뢰아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그 곳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거기 보면 왜 갈라디아보다 베뢰아에서 훨씬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는가 하는데 대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 뒤에 살펴보겠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고 복음이 정말 그런가 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베뢰아에서의 선교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원인을 베뢰아 사람들의 너그러운 성품에 돌리고 있는 셈입니다. 


너그러움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음 마주치는 것이나 내 생각과 다른 것들에 대한 열린 마음을 뜻합니다. 적어도 내 생각과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인정할 줄 아는 여유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성경은 베뢰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그러한 베뢰아 사람들의 그러한 성품과 태도에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베뢰아 사람들의 성품과 태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은 영혼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절대로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구원얻기로 작정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성품과 태도를 잘 지켜고 다듬어 가지 못해서 그 마음에 너그러움이 없다면, 전혀 것들을 받아들일만한 마음의 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즉각적으로 복음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너무나 쉽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결국에 오기는 오지만 똑같은 길을 너무 오래 걸려서, 그리고 너무 힘들게 옵니다. 우리가 이런 현상을 흔히 부르심의 때가 달라서라고 설명하는데요. 오늘 본문을 보면 그것 말고도 아주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평상시의 마음가짐과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자 마자 즉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믿음에 이르는 데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에게는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다른 것, 처음 만나는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의 관대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꽤 오랫동안 매일 매일 바울이 들려준 복음을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메시야에 대한 말씀들과 맞춰보는 과정을 거쳤고 결국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도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처럼 자기 생각과 자기 것에만 갇혀 있는 속좁은 사람들이었다면 데살로니가의 사람들처럼 반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성경에는 그들에 대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은 성령님께서 하시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인격의 상태와 그런 상태가 만들어 내는 자기 바깥의 세상에 대한 태도 또한 무시하지 못할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입니다. 적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시점에는 정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본문을 읽다가 이것이 신앙이 시작되고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미 복음을 믿고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 다음에는 거의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또 믿음의 참된 유익도 누리지 못하는 채로 제 자리에서 맴돌고 때로는 뒷걸음질을 치기도 합니다. 목사로서 그런 분들을 보는 것은 정말 얼마나 속이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항상 제 자리에 있거나 혹은 뒷걸음질을 치는 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자기 라는 세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내가 다 알아서 한다. 내가 정답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무슨 신앙적인 조언이나 권면이 전혀 먹혀들지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더 열정적으로 하자는 권면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자기 자리에 한결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그렇게 변하지 않는 표정만큼이나 신앙도 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는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나중에 깨닫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그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 집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알기는 아는데 계속 그 자리에 계십니다.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몸, 그 자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영혼이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 힘이 너무 강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이 날마다 살아있고 성장하며, 그래서 더 능력있고 풍성한 신앙이 되어져 가기를 바라시죠? 그러면서도 날마다 더욱 더 바른 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신앙이 되기를 바라시죠? 그렇다면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신앙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혼자서 충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외부의 자극과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풍성해 질 수 있고 또 더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속에 ‘내 신앙은 내가 다 알아서 한다’는 선하지 않은 고집이 있다면 그것부터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일단 이렇게 열린 마음이 되면 그런 성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메워주고 또 세워주어서 더 온전하고 풍성한 삶과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에, 그 말씀을 간절하게 듣고 또 받으려는 마음과 태도가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지 않으면 믿음이 생겨나지 않듯이 성도가 되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받지 않으면 그 믿음은 절대로 건강하고 든든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런 믿음은 그 자신의 인생에 큰 의미가 되어 줄 수도 없고, 그 사람을 붙들어 주는 능력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잘 인정하려고 들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듣는 것이고 내 신앙생활의 질은 그것과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보니까 전혀 아닙니다. 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습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졸고 다른 생각하는 특정한 기간 동안에 그 분의 모습을 보면 기쁨과 생생함이 없습니다. 다른 성도들과도 갈등하고 부딛히는 회수도 늘어나고, 작은 일에도 짜증을 많이 냅니다.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 집니다. 그런데, 똑같은 분이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들을 때, 그 분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표정이 밝아지고 생생해 집니다. 다른 분들에게 더 친절해 집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보여질 정도입니다. 예전에 이기지 못했던 시험도 거뜬히 이겨냅니다. 사실 이것은 계속 반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를 살리고 또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진지하고 간절하게 받지 않으면 영혼이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영혼은 말씀에 대해서 더 무감각해지고 그러면 말씀을 더 바라지 않게 되어서 그만큼 더 영혼이 시들게 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성도가 말씀에 대해서 가져야만 하는 첫번째 태도가 간절함이라면 두번째 태도는 그 말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11절 후반부를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설교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그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말씀에 대해서 필요하다고 알고 또 배워온 내용의 전부이니까요. 그러나, 말씀을 그렇게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만으로는 예전의 생각이 충분하게 새롭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지만 그것을 붙들고 몇 날 며칠을 씨름했습니다. 구약성경을 펴 놓고서 정말 바울의 메세지가 맞는가 하고 깊이 생각하며 공부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했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스스로 확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경을 깊이 생각하며 연구했고 드디어 바울이 전한 복음이야 말로 구원의 진리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래서 그들은 확실한 믿음에 이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수십년씩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도 복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조차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 땅의 교회 안에서 ‘덮어놓고 믿으라’고 외쳤던, 반지성주의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에 빠졌던 목회자들의 탓입니다. 공공연하게 성도들이 많이 알면 골치 아파진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깊이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던 목회자들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많은데요. 저도 같은 목회자로서 그 책임을 통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인데요. 제가 우리 교회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목회이지만 이게 정말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이미 ‘몰라도 예수 믿을 수 있다’, ‘예수 믿는데 꼭 저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하는 그릇된 생각이 너무 뿌리깊게 박혀 있어서 진리를 배우고 생각해서 자기 믿음의 내용으로 삼으려는 노력들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설교를 할 때, 먼저 본문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밝혀놓고 시작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설교의 앞부분은 주로 그 말씀을 해석해서 바른 의미를 알려드리는데 사용하지요.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저는 성경본문의 의미와 상관이 없는 설교는 성도의 영혼을 위한 제대로 된 양식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영혼에 독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설교에서는 그래서 그렇게 성경 원래의 의미를 밝히는 앞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성도들은 그 앞 부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적용하는 부분에 가면 그 때부터 듣기 시작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나는 그저 은혜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를 주실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래서는 성경에 뿌리를 내린 신앙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몰라도 예수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믿는다는 사실 보다 오히려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바른 진리 위에 세워진 믿음이 아니면 그 믿음을 구원얻는 믿음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헛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진리는 결코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는 이 세상에 관한 가장 무거운 내용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 그 분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그리고 그 분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관계, 그리고 그 시작과 마지막. 이런 것들에 대한 진리를 다루는 것이 기독교이고, 성경이 말하는 그런 진리들을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저 예수 믿고 구원얻는 게 기독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평생 배우고 생각하고 그런 진리를 아는데 있어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믿음의 기둥을 세우고 내용을 채워가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아갈까 하는 일에는 정말 열심히 머리를 쓰면서 삽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영생에 관련된 진리를 알아가는데는 우리의 머리를 사용하는 일을 귀찮아 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한 지식을 챙기는데는 굉장한 열의를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우리 영혼의 참된 건강을 위한 진리를 알아가는데 관심이 없어 한다면 그런 사람도 그 영혼이 든든해 지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이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고 머리를 많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도록 여러분의 마음의 장애물들을 치우시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과 삶을 지탱하는 참 진리가 되도록 성경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탄의 속삭임에 속지 마시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더욱 더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처럼 순전하고 든든한 믿음에 이르러 그 믿음의 영광과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에 헌신하는 여러분에게 참 진리와 믿음의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항상 이런 은혜를 놓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