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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4.10. 금요기도회 -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사도행전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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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7장 16-34




베뢰아에서 새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에까지 찾아와서 해꼬지를 하려고 하자 바울을 아테네로 보냈습니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을 거기까지 안내한 사람을 다시 되돌려 보내면서 빨리 가서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으로 오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렇게 그 사람이 돌아가고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되돌아 아테네로 오는 사이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아테네 여기 저기를 돌아 보았습니다. 그 때 바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신전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마음에 아주 커다란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유대교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가지고 변론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당시의 헬라 세계에서 광장 역할을 했던 장터에서 아테네 사람들과 복음을 가지고 변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철학이 굉장히 발달한 학문의 도시였는데요. 그 당시 철학은 오늘날의 철학과는 달리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을 중심으로 해서 이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복음과 닮아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성도들은 복음은 그저 믿음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복음을 참으로 믿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얻지만, 그 다음에는 그 복음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 놓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나 자신과 나의 인생을 해석하는 방식... 우리가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 복음을 안경으로 삼아서 모든 것을 바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빨간 선글라스를 쓰면 온 세상에 빨갛게 보이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면 온 세상이 검게 보이듯이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되면 우리는 복음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과 똑같은 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인생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복음이 세상의 철학들과 많이 닮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그런 여러가지 색깔의 안경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안경 중에서 유일하게 이 세상과 거기 속한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참된 안경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안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색깔이 잘못된 안경, 촛점이 맞지 않는 안경, 이리 저리 뒤틀린 안경을 쓰고서 저마다 자기가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아테네 사람들을 보고서 마치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어서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이라는 안경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장터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 복음을 이야기 하니 그 당시 아테네에서 주류로 인정받고 있었던 철학의 전문가들과도 논쟁을 벌이게 되었고 결국 바울은 그들의 손에 이끌려서 아레오바고라는 공개토론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그저 어떤 새로운 철학을 주장하는 떠돌이 연설가이거나 혹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을 전하는 사람쯤으로 여겼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주장이 있으면 그것을 듣고 평가하는 일을 낙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아레오 바고였기 때문에 바울에게도 거기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기회를 얻은 바울은 거기서 공식적인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와는 달리 이야기를 성경으로부터 풀어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바울은 그 당시 아테네에 있었던 한 신전에 대한 이야기로 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전의 주인의 이름은 ‘알 수 없는 신’이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없는 신을 섬길 수 있고 또 그 신을 위해서 신전을 지어 놓을 수 있을지 의아해 하실 수도 있지만 그 당시의 헬라세계가 어떤 세계였는지를 아신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당시 헬라세계의 이방인들은 정말 별의 별 신을 다 섬기고 있었습니다. 진짜로 있었던 신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궁이의 신이 있구요. 그 아궁이의 불을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구요. 그 불이 아궁이 바깥으로 나올 때 그것을 다스리는 신이 있습니다. 불을 다스리는 신도 있고, 불 자체도 일종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과 관련된 신들을 나열해 본다면, 임신을 관장하는 신, 뱃속의 태아를 보살피는 신, 산모의 산도를 광장하는 신, 아이가 나오는 일만 책임지는 신이 다 따로 있었습니다. 남자 아이일 경우와 여자 아이일 경우의 수호신이 또 달랐습니다. 신들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불안해 진 거죠. 혹시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놓친 것은 없는지, 그리고 그것을 관장하는 신은 없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그 신을 달래기 위해서 신전을 지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부터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내가 다녀보니 너희는 매사에 종교심이 풍부해서 그런지 너희 자신도 모르는 신까지 섬기고 있더라, 그런데 나는 너희가 모른다고 하는 그 신이 어떤 신인지 안다. 이제부터 내가 그 신에 대해서 설명해 주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들이 모른다고 한 그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 것의 요점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재이시다. 둘째, 그렇지만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실은 우리가 그 분 덕분에 살고 움직이며 또 존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찾으려고 하기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만큼 가까이 계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람들의 생각과 재주로 만든 우상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세 가지 이야기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이 내딛은 첫발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전하려는 하나님이 다른 이방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워낙 이방신들에 강하게 사로 잡혀 있고, 또 자신들이 제일 똑똑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경을 이야기하고 처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해서는 안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야기한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온전하게 돌아가는 회개를 명하셨다고, 그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요 심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확실한 증거가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헬라인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 중에서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들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영혼이 겨우 벗어난 감옥인 육체로 다시 되돌아 오는 의미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바울을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렇게만 복음을 전한 후에 아레오바고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중에서도 아주 소수이지만 그들 중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된 사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아레오바고의 관리자였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과 또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이 사람들만 예수를 믿고 나서 아테네를 떠나게 되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바울의 아테네에서의 전도가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바울이 아테네에서는 복음을 너무 그 곳 사람들에게 맞는 형태로, 철학의 옷을 입혀서 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복음은 무식하게 피뭍은 십자가 이야기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정말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눈으로만 이 일을 보고 평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 드릴테니 잘 들으시고 제가 드리는 질문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선교사가 선교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게다가 그 곳은 이스람교가 너무 강해서 실제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거의 믿지를 않습니다. 그 선교사는 거기서 십년이 넘는 세월을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삶으로 보여 주었고, 가끔씩 당신이 믿는 신이 어떤 신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을 전했지만 단 한 사람도 복음의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떤 목회자가 가족과 함께 유교와 미신이 아주 강한 시골 어느 마을로 목회를 하려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질 않습니다. 교회에는 항상 그 목사님의 가족과 나이 많으신 성도 몇 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자만 넘쳐나는 이 시대를 보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정직하게 목회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직한 메세지가 인기가 없습니다. 항상 타락한 본성과 잘못된 신앙, 그리고 바른 삶과 경건함에 대한 말씀만 전하니, 불편한 십자가 이야기만 하니 그 교회에 사람들이 왔다가도 다른 교회로 갑니다. 그래서 수년이 지나도 거의 사람이 불어나질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제가 소개한 이 세 분의 사역자들은 그러면 선교에 실패하고 목회에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약 이 세 분들의 사역을 실패라고 평가한다면 그렇게 할 때 사용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숫자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숫자, 교회를 채우는 사람들의 숫자. 숫자를 기준으로 놓으면 이 세 분의 사역은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전혀 온당치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과 정반대이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이런 평가가 한국 교회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성공한 목사하면 큰 교회 목사를 생각합니다. 좋은 교회하면 모든 것이 갖추어진 큰 교회를 떠올리구요. 반면에 작은 교회 목사는 성공하지 못한 목사입니다. 몇 년 째 성도의 숫자를 불리지 못하고 그냥 원래부터 있던 성도들만 돌보는 목사는 무능한 목사이고 실패한 목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렇고 때로는 자기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남들이 아니라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교회를 생각할 때, 항상 크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있고 크기 때문에 시큰둥합니다. 좀처럼 몸된 교회를 위해서 크게 헌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과 마음 상태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릅니다. 


제가 요즘 남서울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화종부 목사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한 주에 한 편씩 그저 차로 이동할 때마다 틀어놓고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는데요. 그렇게 반복해서 들으니 그 말씀이 이렇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영혼 속으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분이 설교 중에 자신이 신학교에 다닐 때 선배들이 목회에 성공하려면 40일 금식기도 해야한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고 하면서 그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에도 성공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성공인데 무슨 성공이 더 필요합니까? 목회는 성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하는 것인데 목회에 무슨 성공이 있습니까?”하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아테네에서의 사역을 실패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목회와 하나님의 일을 마치 장사나 사업을 바라보는 눈으로 보면서 그런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기가 쉽습니다. 목회와 교회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가 자기 여전히 자기 인생을 그런 식으로 평가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세상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 참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이 우리들 안에서도 성공을 이야기 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 그 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제대로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가? 그러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사는 가?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맛보며 살아가는가? 이런 것들만이 성공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든 성도들이든 이것 밖에 다른 성공은 성공이라고 말해서도 안되고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성도가 그런 기준으로 자기 인생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인생이 전부 다 망가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실패라고 평가하시는 그런 인생이 되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도 숫자나 크기를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질입니다. 그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으며,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또 그 믿음에 얼마만한 능력이 있는가,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을 얼마나 기쁘게 헌신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바른 기준에서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 집니다. 크고 화려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주님 보시기에는 ‘정말 나쁜 교회’일 수 있고, 작고 볼품 없고 몇 사람 모이지 않아도 ‘정말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전혀 평가의 기준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 교회는 절대로 좋은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작기 때문에 속이 상하시고 교회를 생각할 때 그저 그런 마음이 되십니까? 그러시면 안됩니다. 절대로 우리 교회의 크기가 작다고 슬퍼하거나 절대로 기가 죽거나 교회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마음이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기도 드릴 때, 절대로 그런 것들 때문에 기가 죽어서 속상해 하시면서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건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해야 하고 또 안타까워 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믿음의 능력이 없는 것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식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영혼에 대한 열심이 없으며 구원의 감격이 식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이런 모습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하며 울며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 자신과 교회를 위한 기도부터 그렇게 바뀌어야만 합니다. 앞으로는 빈 자리가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을 채워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세가 약한 것보다는 믿음이 약한 것을 놓고 더 많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이 일을 통해서 그 도시에서는 몇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돌아왔지만 바울은 절대로 거기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썼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로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주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교회, 여러분의 인생과 또 자녀들의 삶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이루고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성공의 증거가 될 수 없고,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실패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하시고 그 믿음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진짜 성공, 주님이 성공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성공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성공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봄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제대로 분별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로 성공한 인생을 사는 영광스러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