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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3.15. 주일오전 - 그 때에 여호와께서(여호수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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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여호수아 5장 1-12절




방학이 거의 다 끝나고 개학이 가까와 오면 아이들 엄마가 항상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것들이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 학교는 갈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방학이 딱 시작되면 그 때부터 아이들의 삶은 제 멋대로가 됩니다. 전날 늦게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고 하는 생활이 방학내내 개학 바로 전날까지 계속됩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아이들의 삶은 변함없는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아주 가끔 자기 친구들과 약속이 있거나 혹은 특별히 갈 곳이 있는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말 깨우지 않아도 알아서 일어나 마치 전혀 다른 아이처럼 행동하지만, 그 다음 날부터는 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활에 거의 두 달을 익숙해져 있다가 개학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집사람의 기우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물론 아침마다 아이들을 깨우느라 작은 소란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개학날부터 아이들은 방학 때보다 거의 너댓시간을 먼저 일어나 잔뜩 치푸린 얼굴로 학교에 갑니다. 그리고는 또 한 학기 잘 버텨냅니다. 아이들은 마치 트랜스포머라는 영화에 나오는 로보트들 같습니다. 그 로보트들이 자동차가 되었다가 로보트가 되었다가 하듯이 아이들에게는 가정용 모드와 학교용 모드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속은 터지지만 말입니다. 


여호수아 5장부터는 무대가 바뀌어서 본격적으로 요단강 서쪽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요단 서쪽으로 건너 왔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말도 안되는 시기에 넘칠 듯이 굽이쳐 흐르는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요단 서쪽의 가나안 족속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도저히 저 강은 지금 못 건너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그들이 떡 하니 자기들 앞마당에 들어와 있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바로 그 요단 강을 가르고 거기로 걸어서 건너왔다고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라는 신이 그렇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단 서쪽에 살던 아모리 족속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그 소식에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리한 상황을 앞에 놓고서도 곧바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길갈에서 머물면서 하나님의 공격명령만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뜻 밖의 요구를 하셨습니다. 요구는 두 가지였는데요. 첫번째 요구는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할례를 주라는 것이었고 두번째 요구는 거기서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지만, 원래 그 때가 되면 반드시 유월절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것 또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 시기에 요단강을 건너게 하고 유월절 바로 직전에 할례를 받게 해서 이 두 가지를 이어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모든 면에서 최고로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두 주 동안의 공백기간을 만드시고 그 기간 동안 두 가지를 행하라고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다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들은 그렇지가 못했기 때문에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뀝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나라가 세워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야 말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할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백성인데, 할례라는 것이 바로 그 관계를 증명하는 증명서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때에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아브라함과 정식으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난지 8일이 되면 예외 없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셨습니다. 그러면서 14절에서는 이런 주의를 덧붙이셨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왕도 있고 백성도 있고 영토도 있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례를 받는 일은 생략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 이유는 단지 몸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표시를 지니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고 아직 회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 때 행한 할례의 아주 중요한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9절입니다. 찾으셔셔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할례는 분명히 언약백성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하는 언약의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길갈에서 행한 할례에는 그것 말고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할례는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온 후 광야생활을 끝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벗겨지지 않은 애굽의 수치를 안고 있었고, 그 애굽의 수치를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길갈에서의 할례는 바로 그 애굽의 수치를 벗어버리는 예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여전히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애굽의 수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6절과 7절을 보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 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됨이라” 출애굽 2세대가 모두 할례가 없는 자들이 된 이유는 그 아버지 대에서 저지른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 세대와 함께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매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애굽의 수치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신앙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이것이 첫번째 애굽의 수치였고 두번째 애굽의 수치는 그것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지 못하고 광야를 헤매다가 거기서  생애를 마감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가 애굽에서 나올 때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을 버리고 떠나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애굽의 수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아버지 세대는 분명히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세대입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애굽에서 배운 습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이라는 엄청나게 긴 기간을 애굽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자유인으로 살았던 기간도 있었지만 그 때도 그들은 애굽사람들의 허드렛 일을 해주고 눈치밥을 먹으면서 살았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머물게 하신 이유는 거기서 그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70명 밖에 안되는 사람들을 가나안 땅을 차지할 하나의 커다란 나라로 키우기 위한 요람으로 사용하기에는 애굽보다 좋은 곳은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종살이를 너무 오래 했기 때문에 좋지 못한 노예의 습성이 몸에 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와서도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세대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할례를 통해서 그것을 벗겨 벼리려고 하셨습니다. 할례를 받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그들이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입구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번째로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그 자리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특별한 절기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경험한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였고 또 하나 그래서 자신들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신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덕분이었고, 그래서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 말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됨이 온전히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것이 희미해지고 또 잊혀지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이란 살아가는 환경이 풍요롭고 편안해지면 그렇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게 되어 있고, 그 기억과 함께 그 때의 마음도 함께 잃어버리게 되기가 정말 쉽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주변에서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요. 솔직하게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하죠. 그런데, 이런 똑같은 일이 신앙 속에서 일어나면 우리 영혼에 굉장히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또 오래 계속되면 그 사람은 자신을 구원하신 은혜를 망각하고 마치 자신의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것처럼, 자신이 세운 공로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교만해지고 자꾸 자기 공치사를 하게 되죠.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흐려지게 되고 그것과 더불어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만약 그런 것들을 잃어버린다면 몸은 약속의 땅에 있지만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가 없게 될테니까요. 


그런데, 유월절 이틀째 되는 날, 광야생활 40년 동안 계속 하루도 빠짐 없이 계속되던 일이 갑자기 멈춰졌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하늘에서 내렸던 만나가 그쳐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흔하던 만나를 아무리 찾고 찾아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정말 최고의 양식이었습니다. 전혀 수고할 필요도 없이 매일 하늘에서 내렸고 그저 거둬다가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서 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해가 뜨면 저절로 스러질 정도였으니 부드럽기는 또 얼마나 부드러웠겠습니까? 맛도 구워 놓으면 꿀 섞은 과자 같다고 했는데, 요즘이야 꿀 섞은 과자가 전혀 귀한 것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나라를 막론하고 제일 맛있는 것은 단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옛 이야기에 꿀을 독약이라고 자기 제자들을 속였던 훈장님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단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귀한 단 것도 매일 그것만 먹으면 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나는 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내려보내 주신 완벽한 양식이니 아마도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단 맛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구워서 먹으면 입에 들어가면서 파삭하고 기분좋게 부숴지고 그리고 나면 아주 적덩한 달콤한 맛과 함께 부드럽게 사르르 녹아내려 없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만나였을 것입니다. 영향균형도 완벽하게 맞았겠지요? 그것만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건강식 중의 건강식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려고 만드신 가장 특별한 식량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좋은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난 곡식을 먹자 마자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신 것일까요? 계속 주셔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분명히 만나만큼 좋은 양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부터 한시적인 목적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명령에 따라 이동하는 동안에 그들을 먹이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씨를 뿌릴 수도 없고,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 곡식을 추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먹여 살리시기 위해서 주신 일종의 비상식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광야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기를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이리 저리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고, 이제는 우유와 꿀이 흐른다고  표현될만큼 기름진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만나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비상식량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이제 평상시가 되었으니 평상시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건빵이 맛있다고 전쟁이 끝났는데도 건빵만 먹을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나는 하루에 일주일치나 혹은 한 달치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매일 아침에 그 날 먹을 양만큼만 주어졌습니다. 남길 수도 없었지요. 남겨 두면 여지 없이 썩어버렸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만나를 이런 방법으로 주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매일의 양식을 이런 식으로 얻고 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에서는 양식을 구할 곳이 전혀 없는데 양식이 똑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내일부터 아침 일찍 문 앞에 나가보면 양푼에 딱 그날 먹을만큼의 양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긴가 민가하면서 문 밖으로 나가보니 정말 양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하루를 잘 살았습니다. 내일도 또 주어질까 불안해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나가보니 또 양식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한 달 두 달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 그 사람은 정말 자기 말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그 사람은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않는구나. 이제 양식은 걱정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때부터는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양식이 생길 것을 믿고 기대하면서 평안한 마음으로 잠 자리에 들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그렇다고 해서 쌓아놓을 양식도 없으니 매일 양식을 공급해 주는 그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를 잃어버리지도 않을 것이구요.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그 날 먹을 만나만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만을 믿는 연습을 시키신 것입니다. 40년 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반복해서 배우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단계 훈련에서 2단계 훈련으로 들어가셨습니다. 2단계 훈련이란 그 하루를 일년으로 확장할 수 있게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이제 양식은 매일 주어지지 않습니다. 일년에 두 번 맥추절과 수장절에만 수확이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매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야 그 두 번의 추수를 할 수 있고, 그래서 다음 추수까지 생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 기간은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실 것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또 다시 일년치의 양식과 씨앗을 주실 것이며, 그렇게 우리의 양식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게다가 가나안 땅에서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오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년에 두 차례 여름과 늦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것보다도 자기 노동의 결과로 얻은 것은 그저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달 동안 수고해서 벌어들인 수입이나 월급은 완전히 내 맘대로 해되 되는 100퍼센트 ‘내 것’이라고 생각하죠. 현대의 성도들에게 십일조 문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 중에 하나가 되어 있는데요. 저는 이 문제가 이렇게 예민한 문제가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열 중에서 하나를 드림으로써 원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힘으로 얻은 내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서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꼭 드려야 하느냐, 신약시대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자신의 수입 전부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정말로 믿고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십분의 오가 아니라 십분의 일을 달라고 하신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감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도 여전히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그들은 결코 믿음에 있어서 탈선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양식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불순종 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할 것이고 또 그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이틀째 되는 날, 그들이 그 땅의 소산을 먹었을 때 40년 동안 매일 주시던 만나를 완전히 끊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는 하루 하루가 아니라 온전히 1년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고, 또 열심히 땀흘려 일하면서도 그러한 노동의 열매가 자신이 만들어 낸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유월절 다음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서 난 곡식을 먹자 마자 만나를 딱 끊어버리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애굽에는 애굽의 방식이 있고, 또 광에에는 광야의 방식이 있듯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은 애굽이나 광야와는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그 곳에서 사는 것 답게 살아가려면 애굽의 방식을 버려야 하고 또 광야의 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아이들이 방학이 끝나서 학교에 가서 제대로 학교생활을 하려면 방학 때의 삶의 방식을 떠나고 버려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애굽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애굽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광야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무언가에 묶여서 노예처럼 살고 광야에서 사는 것처럼 척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전에 그 두 가지를 행하라고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상적으로라면 젖과 꿀이 흐르는 듯한 풍성함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애석하게도 성도들 중에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는 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건 실제적으로건 말이지요. 그 이유는 이미 구원을 얻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의 방식, 광야의 방식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기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 옛날의 방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땅은 가나안 땅인데 그 땅에 사는 성도들의 삶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에서의 삶을 닮아 있고 광야에서의 삶을 닮아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의 방식은 어떤 것이고 광야의 방식은 또 어떤 것일까요? 우선 애굽의 방식은 광야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보여준 모습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삶을 살았고, 그러다가 거기 조그만 문제라도 생기면 금새 근심하며 두려워 하고 불평과 원망에 빠져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하나님이나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나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항상 마지 못해 하듯이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유인이나 자녀가 아니라 아직도 애굽의 노예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두 번째로 광야의 방식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큰 틀을 말씀드리면 광야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그 원리는 똑같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공급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와는 달리 가나안 땅 안에서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장과 일터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 일의 열매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을 확실하게 믿으면서 말입니다. 매일의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우리 삶 전체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확장시켜 가면서 신실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놓으면 안되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없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도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고 은혜를 잊지 않고서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문 앞에서 그 땅을 주시기 전에 할례를 받게 하시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시며 만나를 그치게 하신 것은 그것이 가나안 땅에서의 삶을 가나안에서 사는 삶 답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방식과 광야의 방식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가나안에 어울리는 복된 삶의 방식을 취하셔서 매일 매일의 여러분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 그리고 주님의 평강 넘치는 삶으로 가꿔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이제는 믿음으로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고서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애굽의 습성과 광야의 방식을 버리고 떠나게 하소서. 그래서 내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서의 삶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