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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3.08. 주일오전 - 표증과 기념이 되리라(여호수아 5)


20150308SM.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4장 1-24절




‘자식은 겉 낳지 속 낳지 않는다’는 말. 아마도 자녀를 낳아 길러 본 사람들치고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시는 분들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 많은 분이 그러셨겠지만  저도 처음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면서 이 말이 얼마나 정확한 자녀양육의 진리인지를 점점 더 깊게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와 둘째. 정말 신기했습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부모인 저 자신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이들을 기르면서 굉장히 당황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속에 정말 어떻게 해도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품과 이런 생각으로 자라 주었으면 하고 바라면 여지없이 그 기대는 깨지고 맙니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부분은 안됩니다. 물론 기대이상으로 훌륭하게 자라주는 부분도 있구요.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자녀는 겉 낳지 속 낳는 게 아니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실 그것을 확실하게 인정한 후 부터 개인적으로는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데 조금의 자유와 여유를 가지게 되었지만 또 그만큼 자녀교육의 어려움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대단해도 자녀의 마음과 생각까지 어쩌지는 못합니다. 더 깊고 중요한 부분일수록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이야 말로 자녀들의 마음과 생각의 가장 깊은 부분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게다가 신앙은 가장 엄밀하게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 당사자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끼어들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믿는 부모로서 자녀들의 신앙을 그저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을 읽고 외우게 하고 큐티를 시키고 수련회에 보내고 윽박질러서라도 주일 예배에는 꼭 참석하게 합니다. 물론 아주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나중에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게 애쓰고 힘쓴 신앙교육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머리가 커 가고 성인이 되면서 아얘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되는 자녀들도 생겨나고 부모들이 생각한 만큼 신앙이 자라있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부모세대는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꼬박 꼬박 예배도 드리고, 새벽기도도 합니다. 교회를 위해 열심히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의 세대는 신앙적으로 볼 때, 생각만큼 훌륭하지 않습니다. 겨우 겨우 신앙의 명맥만 유지하면서 정말 믿는지 믿지 않는지도 불분명할 정도인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자라면서 계속해서 교회에 속해 있었고 주일학교와 청년부를 모두 거쳤는데도 그렇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것이 요즘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비록 우리가 자녀들과 다음 세대의 영혼을 책임지는 일이 이렇게 힘드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가정들과 교회는 여전히 그들에게 신앙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어지게 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크고 특별한 일들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의 명맥을 잘 이어가는 것만큼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소명은 없습니다. 이 소명에 무관심하고 또 이 소명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음 세대로 신앙의 바통을 잘 넘겨주는 일만큼 까다로운 일도 없고 또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거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역할들이 있고, 우리가 그 역할들을 어떻게 해 내느냐에 따라서 다음 세대, 우리 자녀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은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역할을 잘 해 냈을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께 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면서 특별한 일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요단강 한 가운데, 레위인들이 밟고 선 곳에서 돌 열 두개를 취해서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밤을 지내게 될 곳에 세워 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을 세워놓게 하신 이유는 그것이 표징이 되고 기념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돌에 대해서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돌은 그 당대의 사람들 보다는 가나안 땅에서 태어날 이후의 세대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후대 사람들에게 요단강을 건넌 일에 대한 표징과 기념이 되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비교적 확실하고 견고한 신앙을 가진 세대는 자신의 기억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경험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붙들고 지켜야 할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어 줍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만 보아도 그렇지요. 지금 50대 후반 이상의 세대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그래도 믿음으로 잘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삶에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에 어쨋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했고 그렇게 해서 인생의 많은 굴곡들을 넘어온 분들이지요. 그래서 이 분들에게는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지워지지 않는 은혜에 대한 생생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과 기억들 덕분에 여전히 그래도 하나님을 잘 붙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림 잡아서 현재 30대 초반 아래의 연령에 속하는 세대는 그런 경험이 그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세대는 우리나라로 치면 가장 풍족한 시대에 태어나서 자라난 그야 말로 아쉬울 것 거의 없는 세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절실하게 하나님을 붙들어야 할 이유가 거의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절실하게 하나님을 붙들어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해 볼 기회도 그만큼 드물 수 밖에 없었구요. 더욱 더 애석한 것은 이 세대로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는 무언가 본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깊은 것들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육 자체가 어려서 부터 아얘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것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들의 기억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마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태어난 이스라엘 후손들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땅의 교회에는 이 단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우리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희미하게 인식하는데 머물거나 아얘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신앙적으로 보면 그 어떤 시대보다도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일단 각 지파에서 한 명씩을 선발해서 언약궤 앞에서 돌 하나씩을 가져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머물 곳에 가져다 놓게 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열 두 지파 모두가 돌을 옮겨오고 또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르시고 걸어서 건너게 하신 그 일은 그저 뭉뚱그려서 기억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한 지파 한 지파가 개별적으로도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한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열 두 개의 돌 중에서 하나를 정확하게 가리키며 저기 저 돌이 너희 할아버지가 요단강 한 가운데서 가져온 돌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때, 아이는 더욱 더 가깝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능력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신 일을 한가지 합니다. 그 돌들을 취한 그 곳에 또 다른 돌 열 두 개를 세우게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신앙에 있어서 보는 것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요단강 한 가운데 표징과 증거를 하나 더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 돌들은 요단강의 수위가 높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건기가 되어서 요단강의 수위가 많이 낮아지면 그 때만 모습을 드러냈겠지요. 평상시에는 길갈에 있는 돌들을 보면서 요단강을 걸어서 건넌 이야기를 들려주고, 요단강의 수위가 낮아지면 그 곳으로 찾아와서 길갈에 있는 그 돌들이 바로 저기서 가지고 간 돌들이라고, 바로 저 곳으로 너희 할아버지가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오셨다고 말해주는 아버지와 그 아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믿는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겠지만 그 아이들은 길갈의 돌과 강 한 가운데 놓여있는 돌들을 머리 속에서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에 대한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데 큰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의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증거는 많을 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후대를 위한 더욱 더 강력한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공동체 전체가 함께 공유하는 증거도 필요하지만 한 가족이나 개인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며 그 증거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우리 교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이야기와 증거들도 있어야 하지만 각 가정이 고유하게 간직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증거들과 이야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질 때,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가정들은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동시에 그 안에서 다양한 은혜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든든한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요단강을 다 건넌 후에 여호수아는 그 돌들을 그 날 야영지인 길갈에 세우게 하고 모든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이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강을 건넜음이라” 여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주셨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의 하나님께서 요단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함과 같았나니...”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삼킬 듯이 맹렬하게 흘러 내리는 요단강을 마르게 하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 2세대를 위한 홍해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넌 사람들, 그러니까 출애굽 2세대의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 요단강을 걸어서 건넌 일은 그 윗 세다가 홍해를 건넌 것과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 돌들이 또다른 홍해사건의 증거라고 말입니다. 자녀들은 홍해에 가 볼 수도 없고, 또 홍해로 가 본들 거기에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걸어서 건넜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저 그것은 옛 이야기로만 전해들을 수 있을 뿐이죠. 그런데, 요단강은 어떻습니다. 그 강은 그들의 눈 앞에서 항상 흐릅니다. 그리고 열 두 개의 돌들은 그 요단강 한 가운데 있습니다. 길갈은 또 어떻습니까?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고 또 항상 열 두 개의 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치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맞춰 보라는 듯이 말이지요. 이렇게 항상 그들과 함께 있는 두 무더기의 열 두개의 돌들은 요단강을 건넌 일 뿐만이 아니라 홍해를 건넌 일도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증거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할아버지 세대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그리고 걸어서 건넜습니다. 또 아버지 세대는 도저히 걸어서 건널 수 없는 시기에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그들도 할아버지 세대처럼 요단강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 세대는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물 앞에서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 홍해의 기적은 전설이 아니구나. 한 번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 그런 일도 아니구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똑같은 기적과 은혜를 경험했다면, 나도 그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시겠구나. 그렇게 나하고도 함께 하시겠구나.’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작은 가슴 속에 나도 그런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야 하겠다는 소원이 생겨나지 않았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자신의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걸어서 건너게 해 주셨고, 또 그 증거로 열 두 개의 돌을 길갈에 세우라고 하신 이유였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는 것”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한 세대만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충분히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 세대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세대도, 또 그 다음 세대도, 아니 세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더 깊고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시고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뉴스 동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소위 대치동 학원가라고 불리는 곳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잘잘못은 뒤로 하더라도 정말 대단한 열정이었습니다. 엄마들이 아침 아홉시까지 다음 날 새벽 한 시나 두 시까지 이제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학원에 보냅니다. 어떤 가정은 아이가 좋은 학원에 다니게 하기 위해서 분당에서 살다가 집을 줄여가며 대치동 가까운 곳으로 이사합니다. 딴 나라 이야기 같지만 덕분에 초등학생들까지 영자신문을 읽고 토론을 할 정도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부모들은 왜 자녀들에게 이렇게 해 줄까요? 목적은 하나, 좋은 학벌을 갖게 해 주고, 그래서 좋은 직업을 선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혀를 찰 일이지만 사실 자녀에게 이렇게 해 주는 것이 오늘날 이 땅을 살고 있는 거의 모든 부모들의 로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부모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과 또 좋은 학력을 갖추게 해 주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그리고 그것을 그 어떤 것보다 앞서는 지상목표로 삼지만 않으면 말이죠.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도 자녀의 신앙에 대해서는 그만큼 애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믿음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해 줄까 그것을 많이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여전히 교회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시험 때가 되면 교회의 중고등부들은 초비상이 걸립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부모들이 예배만 마치면 부서로 찾아와서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 때문입니다. 분반공부도 마치기 전에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조금 늦게 끝난다 싶으면 왜 빨리 끝내주지 않느냐고, 학원 가야 하는데, 시험공부해야 하는데 여태껏 잡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교역자를 나무라기까지 합니다. 이야기인 즉, 신앙생활이야 나중에 해도 되지만 공부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랍니다.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말만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이 말 속에는 분명한 모순이 있습니다. 부모들이 그렇게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아이들이 나중에 대학에 간 다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까요?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아이들로 커 줄까요? 부모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 주일날 학원에 가고 몇 분 더 공부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또 점수 몇 점 더 받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데 과연 시간이 흐른다고 자녀들이 부모들의 계산대로 커 줄까요? 나중에 이 계산이 틀어져서 땅을 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이런 부모들이 없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중에 자녀들로부터 막키웠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엄마때문에, 아빠때문에 내 신앙이 이 모양이라는 원망을 들을 성도들이 눈에 띠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부모들이 나타나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한 세대에서 또 다음 세대로 이어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공동체요 또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그리고 가정이 그런 역할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자녀를 주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 교회에 다음 세대를 맡기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힘으로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갖게 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아주 중요한 역할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그 역할을 감당하는데 소홀해서는 안됩니다. 


대개의 믿는 부모들이 신앙을 전해주기 위해서 자꾸 특별한 종교교육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 맡기신 이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임무를 잘 감당해 내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믿음의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스토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나와 함께 하셔서 행하신 은혜롭고 놀라운 일들에 대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만의 홍해 스토리, 우리 세대만의 요단강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함께 하신 일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스토리를 우리 자녀들에게 들려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들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도록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그들의 삶 속에도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는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이야기가 쓰여질 수 있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부모되고 신앙의 선배된 성도 여러분, 우리가 꼭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한 세대에서 머무는 일이 아니라 대를 이어 계속되는 일이 되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하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우리에게 맡기신 이유는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자녀를 붙들어 주시는 일보다, 우리 다음 세대와 항상 함께 해 주시는 일보다 자녀들에게 더 유익하고 든든하고 더 확실하게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요? 내 자녀가 하나님을 단단히 붙들고 사는 일보다 자녀들을 더 행복하게 하고 존귀하게 하며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요?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믿음으로 살고 그 믿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우리의 신앙 스토리와 증거를 지니는 일은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뒤를 이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우리 자녀들과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 가장 유익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믿음의 스토리를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고 또 그 믿음에 응답하신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넌 영광스러운 이야기를 써 내려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들의 세대에게 확실한 증거와 함께 들려주셔서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 자녀들의 이야기, 아니 더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그들의 이야기가 되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흠 많고 부족함 많은 우리 인생이지만, 그러한 우리 삶의 한 자락이 우리 자녀들을 위한 길갈의 돌무더기가 되고 요단강의 돌무더기가 된다면, 그들의 믿음을 위한 증표가 되고 기념이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이들의 부모로서 그것보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들 곁을 떠나게 될 때, 그들 곁에 있는 우리가 남긴 믿음의 증거들을 보며 마음 든든히 마지막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좀 더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십시다. 좀 더 간절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길갈의 돌무더기를 가진 신앙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가정은 계속해서 우리만의 홍해 이야기와 요단강 이야기를 기록해 가는 증거가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은 그 안에서 풍성한 증거를 지닌 성도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가정들이 대를 이어 하나님을 아름답게 섬기며 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사는 복된 신앙의 공동체로 세워지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