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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2.22. 주일오전 - 언약궤 멘 것을 보거든(여호수아 4)



20150222SM.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3장 1-17절



지난 주 금요일 오후에 갑자기 후배 하나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직장 문제로 김해로 파견나와서 근무 중인 아이인데, 정작 대구에서 근무할 때는 한 번도 저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면서 일 때문에 대구에 잠시 들렀다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저를 보겠다고 짬을 내서 찾아 왔습니다. 20대 중반에 헤어져서 그 날 처음 보는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역시 어릴 때 함께 지낸 사람들이 좋기는 좋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개발부서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관리와 기획 업무를 하다보니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이것 저것 요구하는데, 일을 하자면 그런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다면서 그럴 때마다 정말 많이 갈등이 되고 많이 힘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도 아직 양심이 살아있어서 그렇다고, 힘들어도 그 싸움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말라고 말입니다. 후배는 그 동안 정말 갈등이 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더 힘들었던 건 단지 양심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배가 하나님을 믿고 있었으니까요.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 뭘 좋아하시는지 아는데, 때로는 그걸 접어 놓아야 할 때가 있으니 그게 그렇게 힘들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나라에서, 아니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다 그렇겠지요.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전쟁도 힘겨운데, 인간으로서의 양심도 지켜야 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앙도 지켜야 하니 그 싸움이 몇 배나 무겁고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와 싸워야만 하는 결전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싸움을 생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싸움을 건너 뛰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할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도 이제 두려움과 나약함을 극복하고 당당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도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제는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리고에 갔던 정탐꾼들로 부터 이미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에도 불구하고 딱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제로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을 향해 진격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단의 순간에 그 일을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면, 그 모든 완벽한 준비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진짜로 요단 건너편의 땅을 자기들에게 내어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 확신을 행동으로 옮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증거들을 믿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 믿음에 자신의 행동과 삶을 일치시켜 나가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이 바로 이 경계선상에서 머뭇거리고 있지요. 그렇지만, 믿음의 진짜 능력은 그 믿음이 그 사람의 행동과 삶으로 이어졌을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행동을 그 사람의 믿음의 증거로 인정하시고 그 믿음을 따라 역사하기시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믿음을 따라 결정하고 또 살아가게 될 때, 나의 믿음이 진짜로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 그 때 나타나는 일들을 통해서 진짜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대로 움직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마음 속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믿음과 그 믿음의 진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가장 높은 장애물인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진짜로 여리고 성으로 쳐들어 가는 일도 그랬지만 그 전에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상시의 요단강은 너비 30미터에 깊이 1-3미터쯤 됩니다. 물살은 상당히 빠른 편이구요. 그러니까 평상시에도 그 강을 걸어서 건넌다는 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했던 때는 곡식 거두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비도 많이 내리고 헤르몬 산에서 녹아내린 눈이 그 강으로 흘러들어서 유속도 훨씬 빨라지고 깊이도 훨씬 깊어집니다. 강의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은 200-300미터 까지 넓어집니다. 평상시에는 그저 조금 큰 강이지만, 이렇게 추수 때가 되면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고 하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시기에 요단강을 걸어서 건넌다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 강 앞으로 인도하셨고, 또 그 강을 건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을 집어 삼킬 듯이 굉음을 내며 거대한 용같이 굽이치며 흘러가는 요단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올렸던 단어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이라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복 불가능한 장애물 앞으로 인도하셨으니까요. 우리가 어떤 일을 눈 앞에 놓고서 ‘이건 불가능해.’라고 할 때, 사람의 힘으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대개는 아얘 그 일을 포기하거나 절망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불가능한 과제를 눈앞에 놓고 있을 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왜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허락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힘으로 그 일을 해 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셔서 그 일을 우리에게 주실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진짜 그것을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보라고 주시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일들이 전부 다 하나님의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네 힘으로 해 내는 건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래?’라고 물으시는 질문 말입니다. 우리가 막상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생각하는 일 자체가 참 쉽지 않습니다만, 일단 불가능한 일들은 그 일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 소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걸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그러면 불가능한 일이 나의 소관이 아니라면 그것은 누구의 소관입니까? 바로 하나님 소관입니다. 분명히 내 앞에 있는 나의 일이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건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빨리 그것을 깨닫고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목회가 딱 그런 일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회의 목적은 교회의 건물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숫적으로 부흥시키는 일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목회라는 일 자체를 잘하는 것 조차도 목회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목회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을 참 믿음의 사람,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더 칭찬받는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목회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이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합니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영광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모두 사람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게 바로 목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목회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명히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은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비단 목회만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 인생 전체와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까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빨리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과정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 눈 앞에서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어디 한 번 건너 올테면 건너 와보라고 비웃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정말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먼저 떠나라. 그렇게 하는 것을 보거든 1킬로미터쯤 뒤떨어 져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라 가라. 강가에 도착하거든 언약궤를 짊어진 레위인들이 먼저 물가에 들어서라. 그러면 흐르던 물이 벽처럼 일어서고 마른 땅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모두 그리로 건너가라. 그러면 된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과연 그런 식으로 저 사나운 강을 건널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겠지만 사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이나 갈등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 때는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른 아무런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사납게 흐르는 요단강을 가져다 놓으시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강을 건너라고 하셨던 것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믿음으로 그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강을 건너갈 것인가 아니면 그저 안된다는 생각으로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다행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쪽을 택했습니다. 언약궤를 멘 레위인들을 앞세우고 요단강 바로 앞까지 갔습니다. 백성들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레위인들이 먼저 요단강에 발을 담궜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이 굽이쳐 흐르던 요단강이 갑자기 저 멀리서 뚝 끊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벽이 되어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말도 안되는 요단강 도하 작전은 100퍼센트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면서 몇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첫째는 강을 건널 때 사람이 아니라 언약궤를 앞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더러 앞장 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레위인들이 둘러 멘 언약궤를 앞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언약궤를 통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언약궤는 그 안에 십계명이 적힌 돌판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그것이 언약인 동시에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언약궤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언약궤 위에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인 속죄소가 덮여져 있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앞세우라고 하신 것은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확실한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미 자신들에게 선물로 주셨고 또 결국 완전히 넘겨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으면, 그 땅은 100퍼센트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어떤 다른 조건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우고 그 약속만 믿고 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라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그 언약을 믿는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진짜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그런 성격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은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약과 아주 많이 닮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이 그 계약의 내용을 믿을 때가 아니라 그 계약대로 의무를 이행할 때 실제의 효력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언약이 효력을 발생시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그 언약을 믿을 때가 아니라 그 언약에 순종할 때, 진짜 효력을 발생시키게 될까요? 그것은 참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과 비슷하죠? 사람들도 상대방이 계약을 지킬 것을 확신할 때만 자기 의무를 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믿어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쁜 순종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을 하나로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앞세우되 백성들 바로 앞에 두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들과 거의 1킬로미터쯤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만치 앞서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을 따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그 법궤를 스쳐 지나갔겠지만 백성들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뒤따라 갔던 것입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존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거리는 그렇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그 말씀이 내가 가야할 방향을 지시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야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히 존중해야 했고, 또 그 말씀을 자기 상황이나 편리대로 이렇게 저렇게 바꿀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저 멀리서 내가 가야할 방향을 가르쳐 주는 방향지시등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 강을 건너고 또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새로 세운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아니라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에서 그 언약궤를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치러야 할 전쟁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 고, 지금부터 차지해야 할 가나안 땅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차지할 수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되는 일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입구에서 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점점 더 거칠어져 가고 있고 답을 찾기가 더 어려운 상태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공공연히 미래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들 말합니다. 이전 세대에는 열심히 살면 나아지리라는 꿈이 있었고 그것은 충분히 현실적인 기대였는데, 이제는 열심히 살아도 별로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 사이에 패배감과 자괴감이 널리 퍼져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 서울에 갔다가 후배들을 만났는데요. 이제 거의 50이 다 되어가는 그 후배들 이야기도 똑같았습니다. 예전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 그 다음에 갈 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이제는 한 번 밀려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끝이라고 했습니다. 한 후배는 펀드 메니져인데, 이번에 일하던 회사를 그만둔 후에 자신은 정말 기적적인 은혜로 다시 취업을 하게 되었지만, 자기가 아는 서울대 출신 펀드메니져는 정말 똑똑하고 열심히 일했는데도 밀려나서 갈 곳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학벌이 그렇고 경력이 좋으면 여기 저기서 데리고 갔는데, 이제는 그런 길조차 거의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다들 그렇게 예측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몇 년만 잘 견디면 나아질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현실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커져 가는 반면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더 힘이 없어져 가고 현실 앞에서 더 작아져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편안히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자칫 하면 성도들까지도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거세게 흐르는 현실이라는 요단강물 앞에서 ‘극복불가능’이라는 말만 되뇌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은 시대는 성도들에게도 굉장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가 쉽습니다. 영적인 무기력증에 빠지게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는 정식으로 한 번 신앙의 모험을 해 볼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어떤 스포츠 용품 선전에 이런 문구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Impossible is nothing” 우리 말로 “불가능,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번역되어서 선전에 나왔었는데요, 그 때 저는 이 선전문구를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절대로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자포자기하게 만들죠.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왜 우리가 현실화 될 수 없는 것 때문에 기가 죽고 자포자기 해야 하고, 속이 상하고 슬퍼해야 합니까? 어치피 그건 우리의 ‘현실’ 속에는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죠. 그런 ‘없는 것들’ 때문에 슬퍼하고 실망하고 자포자기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불가능한 것은 그냥 불가능한 것으로 내버려 두던지 아니면 그저 나의 발전과 노력을 자극해 주는 도우미 정도로 사용하면 됩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이고 불가능한 일을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불가능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일들을 볼 때마다 꼭 생각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은 우리에에게는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는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야 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가능과 불가능이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한 가지이니까요. 하나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하지 않으시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그 일은 내가 붙들고 끙끙거릴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 맡기면 그만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불가능한 일을 하신다면 그 불가능한 일은 눈앞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하지 않으신다면 절대로 현실이 되지 않을 거구요. 


가능하기 때문에 힘을 내고 소망을 가지고, 불가능하니까 속상해 하고 포기하고... 이것은 성도가 사는 방법이 아닙니다. 참된 성도는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며 그 말씀에 있는 그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실 것이고 하지 않으실 일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행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이루실 것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넘실대는 요단강처럼 우리 눈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극복 불가능’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우리를 위협하면서 거칠게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이름표만 보고 겁을 먹고 그냥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강을 건너 보시겠습니까? 현실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고 거칠어 보여도 그 현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 합니다. 잠잠하라고 하시면 잠잠해 져야만 하고, 갈라지라고 하면 갈라질 수 밖에 없는 그런 피조물 말입니다. 문제는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현실적인 전쟁이든 아니면 영적인 전쟁이든 결국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 말씀이 이 세상을 있게 했고 지금도 있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믿고 붙들고 사는 일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이기는 방법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모두 거짓이고 무용지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극복 불가능’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도도하고 거칠게 흐르는 강물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만 건너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까?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 지십니까? 그렇지만 실은 그 강을 건너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그 강물은 절대로 현실적이고 평상적인 방법으로는 건널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과 순종만이 그 강을 건너게 해 줄 수 있습니다. 현실의 요단강물이 여러분을 위협하며 흐를 때, 그 강을 건너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 그 때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강물은 말씀을 믿는 믿음과 순종으로만 건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만치 앞서가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라서 그 강물에 여러분의 발을 딛어 보십시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그 발걸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승리로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믿음으로 현실에 도전하여 당당하게 그 현실의 강물을 건너는 하나님의 강한 군대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