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2.15. 주일오전 - 라합이 이르되(여호수아 3)


20150215SM.mp3.zip





성경본문 : 여호수아 2장 1-24절




오늘 함께 읽은 여호수아서 2장은 1장과 3장 사이에 끼어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시간적으로도 세 장에 기록된 일들이 차례대로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서 2장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찾아오시기 전 며칠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3장에서 요단강을 건너기 하루나 이틀 전까지에 걸쳐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1장부터 3장까지를 시간차례대로 놓아보면 아직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찾아오시기 전에 여호수아는 여리고로 정탐꾼들을 보냈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만나 든든한 약속을 주셨는데,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정탐꾼들이 돌아와 정탐의 결과를 보고했던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간결하지만 든든한 확신을 주는 보고였습니다. 이것은 이제 요단강을 건너가서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해서 가나안 땅을 전부 정복해야 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또 하나의 성공보증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리고는 가나안의 길목에 버티고 있는 난적 중의 난적이었기 때문에 거기 사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승리를 더 확신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의 보고를 마지막 결론으로 삼고 있는 여호수아 2장은 사실 가나안 정탐 이야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2장의 실제 주인공이 정탐꾼들이 아니라 라합이라는 여리고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2장을 가만히 읽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2장은 분명히 여리고 정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정탐꾼들이 한 일이라고는 라합의 집에 숨어 들어갔다가 나와서 다시 산에 숨어 있다가 그냥 돌아온 일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의 보고를 보아도 자기들이 첩보활동을 벌여서 수집한 정보가 아니라 그냥 라합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만큼 라합이 2장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사실 이 곳 여호수아서 2장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굉장히 비중이 큽니다. 라합은 우선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선대 할머니가 되는 셈이고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거기 라합의 이름이 당당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야고보서 2장 25절은 라합을 자신이 행위로 믿음을 증명한 사람으로 아브라함과 동등한 자리에 올려 놓고 있고, 히브리서 11장 31절은 라합에게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 중의 한 사람이 되는 영광을 안겨주고 있기도 합니다. 한 여인이 성경에 이렇게 자주 그것도 이만큼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는 아마도 라합의 경우가 거의 유일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놀랍게도 정통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멸망당하게 되어 있었던 가나안 일곱 족속 출신입니다. 게다가 그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할머니가 되는 영광을 얻은 라합이 이방인이었고 그것도 기생이라는 깨끗하지 못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숨김 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개 모든 역사의 기록은 유명하고 위대한 인물의 과거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부끄럽고 당당하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의 미래가 아무리 영광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려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과거나 혹은 과거의 죄악과 어두운 구석들을 바라보는 눈이 똑같은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 특히, 하나님 앞에서 청산된 과거는 전혀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그 과거가 아무리 어둡고 때로는 더럽다고 하더라도 그 과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오면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하게 받아주십니다. 이방인이어도 괜찮고 기생이어도 괜찮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그저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의 미래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손에 자신을 맡기면 이방인 기생도 예수님의 할머니요,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의 과거나 현재의 조건에 붙들려 계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과거 때문에 부끄러워 하고 현재의 조건 때문에 기가 죽어 있는 그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자랑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훌륭하지 않은 조건도 그 차제로는 마찬가지구요.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둡고 잘못된 과거나 혹은 자신의 처지에 스스로를 묶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숨기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것 때문에 자신을 비하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들을 통째로 받아주셨고, 또 지금도 용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인지도 모릅니다. 의외로 이 눈이 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믿음의 성장이 더뎌지고 정체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때부터는 자신의 눈이나 세상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때부터는 그 분이 문제 삼는 것은 나도 문제 삼고, 그 분이 문제 삼지 않는다면 나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또 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라는 틀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로운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합이 멸망당할 이방인이라는 것도, 기생이라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그를 받으시고 또 그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정탐꾼들은 밤을 틈 타 몰래 여리고 성으로 잡입했고, 워낙 이런 저런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사람들의 눈을 가장 덜 탈 것이라고 생각되는 기생의 집을 임시거처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움직임은 가나안 백성들, 특히 여리고의 왕에게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40년 동안 애굽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일어났던 가공할만한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듣고 또 들어오던 터에 바로 그 사람들이 이제 여리고 성을 치겠다고 바로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있었으니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은 자기 부하들을 보내서 성의 구석 구석을 물샐틈 없이 살피게 했고, 결국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은 그 레이다 망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갔다는 첩보는 당연히 여리고의 왕에게 즉각적으로 보고 되었고, 왕은 곧바로 부하들에게 체포명령을 내렸습니다. 


정탐꾼들은 몰랐지만 라합은 이미 왕의 부하들이 비밀리에 성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고,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온 일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부하들이 곧 들이 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라합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자기도 명색이 여리고 사람인데, 자기들을 공격하겠다고 쳐들어온 적군이 보낸 간첩이 떡 하니 눈 앞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식적으로라면 두 사람을 충분히 안심시켜 놓았다가 얌전히 왕의 부하들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오히려 두 사람을 옥상에 널어놓은 삼대 속에 숨겨놓고,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성 밖으로 내 보내버렸습니다. 아마 라합은 정탐꾼들을 보자 마자 머리 속에 두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넘길 것이냐? 아니면 숨겨 줄 것이냐? 그런데, 놀랍게도 라합은 이 갈등 속에서 두 사람을 숨겨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고향을 배신하고 동족을 배신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합은 왜 그런 좋지 않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그렇게 왕의 군사들을 따돌힌 후 라합이 정탐꾼에게 했던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라합의 첫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라합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 땅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벌어질 싸움은 여리고가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라합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 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여리고 성 사람들 거의 모두가 라합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간담이 녹을 정도로 겁을 집어먹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을 박살 내셨고 또 그 지역의 맹주였던 아모리의 왕 시혼과 옥의 나라를 전멸시켰는지 전부 다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자신들을 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라합은 여리고의 왕은 절대로 스스로 항복할 위인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도망을 갈 수도 없습니다. 성 밖에는 그렇게 두려워 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백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라합의 집에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찾아옵니다. 순간적으로 생각을 했겠지요. 이 일을 분명히 왕이 알고 있을텐데 왕을 속이는 위험이 더 클까 아니면 정탐꾼들을 넘기는 위험이 더 클까 하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라합은 왕을 속이는 쪽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왕을 속이는 일은 발각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결국 정탐꾼들을 넘기면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라합은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단순히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히 공황상태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 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오늘 본문에서 라합은 분명히 자기 고향과 동족들을 배신했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배신은 배신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요즘 우리의 시각으로만 바라 보아서는 안됩니다. 라합이 살던 시대에는 자신이 속한 나라보다 자신이 섬기는 신이 더 크고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에 충성하는 일보다 믿고 섬길 신을 제대로 정하는 일이 더 크고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의 한 나라는 그 나라를 보호해 주는 신이 없거나 혹은 그 신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전쟁은 나라와 나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싸움이기 전에 신들의 싸움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라합도 자기가 섬기는 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보니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거대한 애굽도 넘어졌습니다. 자기들과 똑같은 신을 섬기던 아모리 사람들의 가장 강한 나라들도 맥없이 무너졌구요. 게다가 그 나라들을 그렇게 만든 여호와 하나님이 홍해까지 반으로 갈라 버렸다는 소식까지 들려 옵니다. 종합해 보니 여호와라는 신은 나라들 뿐만 아니라 자연까지도 마음대로 하시는 어마어마한 신이라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비교가 되었겠지요. 자기가 섬기고 있는 신과 여호와라는 신, 두 신 사이에서 자신은 과연 누구를 섬겨야 할 것인가 저울질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결론은 당연히 더 크고 더 강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으로 날 수 밖에 없었구요. 이런 생각을 가진 라합에게 자기 집에 정탐꾼들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기회 중에서도 가장 좋은 기회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라합이 정탐꾼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면 마치 미리 정해놓은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라합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미 모든 생각을 끝내고 분명한 확신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이방인이었지만 그리고 천박한 기생이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었고 또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고 거기서 생겨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귀에 오랫동안 계속해서 들려온 하나님에 대한 소문들이 라합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내가 아노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이 라합이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나안 족속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떵떵거리고 거들먹 거리는 강한 나라라도 한 순간에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라합이 아는 하나님은 단순히 이런 저런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어떤 일은 할 수 있고 어떤 일은 할 수 없는 그런 신이 아니라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라합은 그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완전히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떠는 여호수아에게 찾아가셔서 내가 함께 할테니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준 율법을 지키는 일을 신실하게 잘 해내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줄테니 나만 믿고 순종의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내가 함께 할테니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과연 어떤 하나님이시길래 내 말에만 잘 따르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 대답은 라합이 들려 주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무리 큰 나라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깊은 바다도 반으로 갈라지게 만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강대국들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위로는 하늘의 주인이시고 아래로는 땅의 주인이시며, 거기 속한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주권과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함께 하실 때 능력이 되시고 함께 하시기만 하면 그 어떤 것도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니 순종을 명하시면서 내 법을 잘 지키기만 하면 다른 것은 내가 다 알아서 해 주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이렇게 헤어지지만 10년 후 12월 30일 오후 2시에 경대병원 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나자고, 그러면 내가 너에게 진 빚을 다 갚고 큰 선물을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100퍼센트 진심이었고,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10년 후에 이 약속이 현실이 될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만 사람이 하는 약속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전혀 거짓이 없는 약속이라고 하더라도 그 약속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습니다. 우선 10년 후까지 두 사람 모두 살아있어야만 하고, 두 사람 모두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두 사람 모두 그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건강이나 시간적인 여건이 되어야 하고, 결정적으로 경대병원역 1번출구가 그 때까지 그 자리에 있어줘야 합니다. 이 모든 조건들 중의 한가지라도 만족되지 않는다면 그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꼭 나쁘고 거짓되어서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정직하고 신실해도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절대로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고, 그래서 아무리 대단한 약속도 실제로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보장이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실 뿐 아니라, 아무런 제한도 없고 한계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또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장소의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시간의 제한도 받지 않으십니다. 온 우주를 채우고 계시며, 그 우주보다 훨씬 더 크십니다. 게다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이런 설명들이 우리들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 모든 조건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분이시라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에게 진짜 능력이 되고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깨뜨려야 할 때도 있으실 것이고, 함께 하신다고 하더라도 도와주실 수 없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산다고 해도 다른 것을 모두 다 책임져 주시지는 못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위에서 말씀드린 모 든 조건들을 완전히 갖추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우리에게 어마 어마한 능력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나머지를 모두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불안하지 않은 약속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라합 뿐만 아니라 여리고의 왕도 분명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꼭같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아는 것이 완전히 같았겠지요. 그렇지만 여리고의 왕은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과 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싸우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라합 똑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항복하겠다는 결정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나온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많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들을 접합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습니다. 주중에도 그렇구요. 텔레비젼과 라디오의 주파수만 맞추면 시간과 상관 없이 하나님에 대한 소문들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교와 간증들이 전파를 타고 항상 우리 귀에 들려 오니까요. 게다가 모두 다 성경도 한 권씩 다 가지고 있어서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기록을 마음대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접하는 내용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여러분은 저를 통해서 똑같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똑같은 소문을 듣고 계시니까요.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오늘 우리에게 라합의 귀에 들려졌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와 소문들을 들려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옛날 여리고 성에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지게 하셨던 것과 그 이유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소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또 참되게 믿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능력 가운데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또 그대로 믿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마 어마한 능력이 됩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그 분의 모든 능력과 선하심이 우리를 위한 가능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꼭 필요한 순간에 우리를 위한 실제적인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라합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앎을 참 믿음으로 연결시켰을 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여리고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을 당할 때, 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을 때,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와 라합은 구체적으로 상황은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은 반드시 꼭 필요한 순간 우리를 건지고 구해주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라합이 보증하고 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보증하는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라합의 입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할렐루야! 라합은 지금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고 말합니다. 땅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너희의 하나님, 너희가 믿는다고 말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우리를 향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만 섬기기로 했다고 간증하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가 그 하나님을 진짜로 믿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눈 앞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들어가 볼 수 조차 없는 곳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라합이 접한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결국 라합을 구하고, 그를 영광스러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충분한 재료가 되었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넘치도록 듣고 있고 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소문과 증거들은 이미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요? 


혹시 하나님을 아는 여러분의 지식을 머리 속에만 넣어두고 계신다면, 이제 그것을 여러분의 가슴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내려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참 믿음의 알맹이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복이 되고, 능력이 되며, 구원이 되는 은혜를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라합이 걸었던 믿음의 길로 인도해 주셔서 우리가 참으로 믿음으로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