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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5.07.03. 금요기도회 -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1(사도행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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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사도행전 18장 5-11절




    제가 목사가 되어 보니 목사라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저에게 무엇을 할 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하나님께서 목사할래 다른 거 할래 하신다면 저는 목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부담스럽다는 뜻입니다. 물론 목사가 되어서 일하기 전까지는 그걸 잘 몰랐습니다. 목사가 되고 나서 목사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점점 더 바르게 깨닫게 되어가면서 그만큼 더 이 일이 그런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의 일에 대한 세간의 속설들입니다. 왜 제가 세간의 속설들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사의 직에 대한 이해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보다는 그저 이러 저러한 사람들의 기대와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것이 원래 성경이 이것이 목회자다, 목회자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배치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저 목회자 다워지기도 정말 어려운데, 사람들이 그런 온전치 못한 기준으로 바라보는 짐까지 져야 한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서 그 무게가 몇 배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짐을 무겁게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성도들이 목사의 직임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목사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그 생각은 성도들의 신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교회마다 전임 목사님이 사임을 하게 되면 새로 담임목사를 청빙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적어도 그 교회의 당회나 중직자들이 목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제가 그 동안 목사로 듣고 보고 직접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회들이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하고 선택할 때, 성경적인 기준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정말 드뭅니다. 물론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목회자의 목회자다움은 대개 그 사람의 속사람과 관계되어 있어서 판단이 쉽지가 않지만, 이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목회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세속적입니다. 학벌을 보구요. 큰 교회에서 사역했는가를 봅니다. 인간관계가 원만했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자기 소개서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사람이 교회에 와서 그 교회를 단기간에 뻥튀기 해 줄 수 있는지 그것을 봅니다. 그래서 번듯한 교회에 뽑혀가는 목회자들을 보면 많은 경우 목회자 답기 보다는 회사의 경영자같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교회의 중직자들이 목회자를 그래야 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목회자, 훌륭한 목회자는 학벌이 좋고 인간관계에 유능하며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들도 정말 목회자 다운 목회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것들을 우리가 흔히 ‘목회’라고 부르는 것을 외형적으로 잘하는 것이나 학벌만도 못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것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어 있으면 좋은 목회자가 어떤 목회자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교회, 그리고 성도들 전체의 영적인 건강함과 신앙에 거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니 정말로 안타까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한 번은 제가 어느 분과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듣고 보니 그 분이 신앙적으로 올바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있었고, 사실 아주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저에게 하는 이유는 제가 자기의 역성을 들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제 의견을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대번에 표정이 변하면서 이렇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이 분은 정말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성도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던 잘 한다, 잘 한다, 그렇게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 주 신다고 말해주는 사람입니까? 그것이 목사가 지니고 있는 존재의 가치이고 이유입니까? 아니지요. 목사는 그러면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영적으로 다 실패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잘 압니다.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목회자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인 듯합니다. 무조건 편들어 주고 위로하고 복을 빌어주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해 주고 하는 사람들이 목회자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목사는 어쩔 수 없이 성도들의 신앙에 직접적이고 아 주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반드시 어떤 목회자가 바른 목회자인가 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스스로 바르고 능력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고, 또한 목회자들도 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역할을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른 것을 요구하면 목회자는 바른 길을 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사실 목사가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중이 제 머리를 깎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참 껄끄럽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목사냐, 누가 목사다운 목사냐, 목사에게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느냐 하는 것만큼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없는 지라 오늘은 본문에 나타난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기준으로 해서 이것을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다가 다 못하면 다음 주에 또 하겠습니다. 들으시면서 제 이야기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 일치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그 동안 여러분이 가지고 있었던 목회자에 대한 생각이 그와 다르다면 여러분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살고 제가 살 수 있습니다. 


    우선 본문을 살펴 보기 전에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은 이 이야기만 하면 시간이 다 될 듯한데요.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릴테니 잘 생각해 보시고 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합니까? 적어도 드러나는 모습 속에서 만큼은 성적으로, 그리고 돈과 관련해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합니까? 그렇지요. 말하나 마나지요. 이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목회자의 윤리성은 목회자의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가 목회자가 완벽해야 하며 완벽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잠시 잠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범죄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본인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교회는 그 목회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구요. 또 그 징계나 벌을 유보시켜 주어서 그가 스스로 회개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범죄가 상습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서 의도적으로 저지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사람은 목회를 계속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죄 또한 용서해 줄 수는 있겠지만, 더 이상 그가 목회자라는 자리에 계속해서 앉아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자리는 그런 사람은 절대로 감당할 수도 없고, 감당해서도 안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질문을 조금 바꿔서 한 번 더 드려 보겠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랫동안 상습적으로 그런 죄를 저지른 목회자가 그 동안 설교를 정말 정말 잘 했습니다. 은혜를 정말 많이 끼쳤습니다. 나에게도 영적으로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 나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그래서 나는 지금 그 사람이라면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얼굴도 잘 생겼구요. 성격도 저하고는 달리 얼마나 부드럽고 친절한지 모릅니다. 목회는 또 얼마나 잘했는지 교회 부임한 지 몇 년 안되어서 교회의 성도가 두 배로 뻥튀기 되어서 여엇한 교회고 성장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경우에도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기준들을 그대로 적용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죄는 용서해 줄 수 있지만, 그 자리가 거룩을 요구하고 윤리성을 생명으로 하는 자리이기에 내 마음은 그 사람 편이지만 그 사람이 더 이상 목회의 직을 맡으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교회가 그런 결정을 할 때, 여러분도 그 쪽에 서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얼마 전에 대구의 어떤 큰 교회 목회자가 교회의 압력에 밀려서 사임을 했습니다. 그 사유는 교회의 성도들이 줄어들고 재정이 어려워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목사가 한 교회를 사임해야 할 이유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기 몇년 전까지 이 목회자는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를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건물도 큰 건물 두 개씩이나 지었고 성도들도 참 많이 늘어났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그 목회자는 몇 번의 추문을 일으켰고, 윤리적인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명백했고, 그런 사람이 목회를 계속하면 안된다고 여길 정도인 그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그 동안은 계속해서 그런 목회자의 편을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외부의 압력이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목회자에게 압력을 넣어서 사임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가 성도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래서 재정이 어려워 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도 그 동안 자기가 저지른 윤리적인 잘못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사임을 하지 않고 버텼는데, 교회가 교인숫자와 재정을 이유로 사임을 권유하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임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경우에 그 목회자와 그 교회의 성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회자로서의 경건과 거룩함입니까? 주님 앞에서의 순결함입니까? 아닙니다. 이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공히 교인숫자와 돈이었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정결함보다 목사가 목사되는데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참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 이야기가 어떤 교회나 목회자를 비방하는 이야기로 들렸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젊은 혈기가 있어서 그런지 저런 이들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저는 그냥 차분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요. 제가 말씀드린 그 교회의 문제가 비단 그 교회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목회자를 그런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윤리성과 도덕성,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지켜내려는 노력보다 현실적으로 교회를 얼마나 크게 만들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목회자 다움을 평가하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말 정말 가슴이 아프고 슬픕니다. 어쩌다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이렇게 되었는지 정말 슬프고 화가 납니다. 


    저는 이제라도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기 전에 사회가, 그리고 이 세상이 우리에게 벌을 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껴집니다. 저는 이미 그런 징조들을 보고 있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성도들이 신앙의 양심을 지키려면 법적인 제제를 받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오늘 설교 참 은혜롭지 않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고, 제 몸과 같은 한국교회의 치부를 들춰내고 있으니 저라고 이 설교가 은혜롭지는 않습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목사도 성도도 모두 잘못된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선 가장 큰 책임은 저와 같은 목사들에게 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의 일을 교회를 잘 관리하고 성도의 숫자를 불리는 일로, 그렇게 ‘목회’를 잘 하는 일로 이해하고 그 이외의 것에는 눈을 감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편하게 하려고 제 기억으로는 목사들이 나서서 그런 사고방식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크게 목회하는 목사, 교회를 잘 관리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고 훌륭한 목사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다른 나라는 잘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목사의 직을 담당해 왔고 또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주님 앞에서 분명히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이러니 당연히 성도들도 그 길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성도들도 목회에 성공하는 목회자, 큰 교회의 목회자를 훌륭한 목회자라고 생각했고, 또 나에게 은혜를 끼치는 목회자를 좋은 목회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면 다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땅의 목회자들과 교회가 이렇게 바른 길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사는 공인입니다. 공인 중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공인입니다. 목사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서 그 짐을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바른 목회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실 때,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기본되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목회자가 일을 잘 하고 잘 못하는 것보다 이것을 우선적으로 바라보아 주시겠습니까? 네. 그러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살고, 교회가 살고, 또 목회자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것 하나만 말씀드렸습니다. 목회자는 윤리적으로 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장기적이고 고질적인 범죄는 없어야 합니다. 절대로 목회자 노릇을 잘 한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모르는 척 해 주시면 안됩니다. 목사는 공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는 그렇게 예민하고 중요한 공인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불쌍한 목회자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저희들도 여러분들과 꼭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인데, 그렇게 살 수 없는 자리로 부름받았으니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더 바르고 더 거룩한 자의 자리에 세워달라고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을 위한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은혜가 베풀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