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8장 5-11절
사람들에게는 모두 자신을 이끌어 주고 가르쳐 줄 지도자나 스승을 생각할 때 그 마음에 품고 있는 ‘상(像)’이라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도 저마다 ‘목회자상’이라는 게 있는 것이지요. 목회자는 이래야 한다, 목회자는 저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기준들이 있고, 그런 기준들을 생각할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나 혹은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다양한 목회자상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바로 사도 바울이 아닐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자세하게 잘 몰라도 우리는 모두 사도 바울을 참 목회자의 모범으로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에 너무 집중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사도 바울은 정말 위대한 인물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결점이 있고 실수가 있었던 한 명의 인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을 닮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는 훌륭한 사표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도 바울이 모델로 삼았던 것이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강한 충동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서 예수님처럼 고난받는 일을 반길 정도였을까요.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 것이 분명합니다. 항상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니 결국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새어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그리고 사도 바울!
여러분도 여러분을 가르치고 돌보는 목사가 이 두 분을 닮은 사람이면 좋으시겠지요? 이제 그런 기대는 버리셨나요? 그저 사람 같기만 하면, 상식적이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시나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마 그래야 속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일단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두 분 같아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향후 얼마 동안은 여러분 앞에 바울같고 예수님같은 목회자가 서서 목회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힘들다고 여겨지고 그래서 두 분과 같은 목회자가 되고 또 자신들의 목회자가 그런 목사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어느 정도 내려 놓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마음 한켠에 그런 목사가 되고, 또 그런 목회자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바울같은 목회자’라는 말을 생각할 때, 이 말을 굉장히 막연하고 모호하게 생각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냥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그것을 사도 바울에게 뒤집어 씌워놓고 사도 바울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바울과 같은 목회자란 과연 어떤 목회자인가에 대해서 아주 명확한 기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바울과 같은 위대한 목회자를 우리의 목회자로 둘 충분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정말 그런 목회자가 나의 목회자가 되어 나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나를 영적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그런 목회자를 따라 신앙생활할 마음의 결단이 서 있습니까? 만약 이런 영적이고 또 실제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히 사도 바울과 같은 목회자가 우리 눈 앞에 나타나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해도 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나아가서 그 유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과연 사도 바울과 같은 목회자를 정말로 원하고 있는가? 그 소원에 걸맞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일단 마음 속에 이 질문을 품고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결코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홀로 사도 바울이 되고 또 사도 바울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그랬지요?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선 아나니아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붙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눈이 먼 사도 바울의 안내자와 후견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이 회복된 후, 그가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 또한 아주 결정적인 사람 한 사람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그게 누구죠? 네.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명예와 평판을 바울을 복음 사역자로 세우기 위해서, 바울이 교회에 받아들여지게 해 주기 위해서 모두 다 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배이고 더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전도자로서의 실력과 능력을 알아 보고는 슬쩍 뒤로 물러나 바울을 써포트해 주는 역할을 맡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얘 사도행전에서 그 이름이 사라져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우선 18장 앞쪽으로 가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나오는데요. 이들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끝까지 바울을 돕는 후견인이 되어준 바울의 동업자들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정말 바울을 위해서 라면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5절에는 실라와 디모데가 나옵니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바로 이들과의 동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와 실라 또한 항상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순간에 그와 함께 고락을 같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직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완전한 유대교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고 회당에 나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사람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반대로 쫓겨난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자기 집을 고린도 전도의 기지로 사용하게 해 주었던 사람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바울의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 장수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장수가 되려면 그가 장수가 되게 해 주는 병사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훌륭한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탁월한 능력과 은사를 주셔도 혼자서 훌륭한 사역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한 종들은 항상 어느 정도는 반대를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사람의 길과 다르니까요.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의 열매를 맺기도 했지만 동시에 극심한 반대를 받기도 했다는 것은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그럴 때, 혼자라면 그 어려움을 모두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모든 사역자들이 아름답게 세워지려면 결정적인 순간 순간마다 아주 요긴한 역할을 해 주는 사람들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준비된 사람, 이미 훌륭해져 있는 사람이 자기들을 위한 사역자가 되기를 바라고, 그런 목회자들만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참 이기적인 소망이지요. 전혀 신앙적이거나 성경적이지도 않구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이 세상에 생겨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를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하면 성도들만이 양육받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양육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요람이 되고 성도들이 양육자가 되어 주어서 그 안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기를 바라십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정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성도이든 목회자이든 공히 교회와 성도들의 관계 안에서 자라나고 성숙해 가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국 교회에 성도들이 바라는 목회자, 그리고 목회자 스스로도 되기를 소망하는 모습의 목회자가 그렇게 드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목회자로서의 능력을 키우려고 합니다. 교회는 자기들 속에 부족한 목회자를 품고 그를 양육하며 그를 세워주려는 생각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 한국교회에는 모두가 바라는 목회자 같은 목회자가 그렇게 드물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회자 또한 사람입니다. 부족함이 많고 연약함이 많은 피조물입니다.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계속 자라나야 하고 성숙해 가야할 그런 존재에 불과합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목회자들이 성도들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있고 또 성숙해 있기 때문에 목사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소명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기 때문에 그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교회의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지지와 신뢰 속에서 더 성숙해져 가고 더 바르고 단단한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들에게만 목회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성도가 중요합니다. 교회에게만 목회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교회가 중요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사도 바울의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사역자들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평신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사도 바울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이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가치를 알아 보았고, 그래서 끝까지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거절하고 핍박할 때, 이런 사람들이 바울 곁에 있었다는 것은 바울에게는 결정적인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은 결코 벽에 걸린 스피커가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래도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알아듣고 반응하며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필요하고 디도 유스도가 필요하며, 회당장 그리스보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주고 필요를 공급해 주며 같은 곳을 바라보아 줄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없어도 그 일은 해야하겠지요. 그렇지만 그럴 때 목회자는 실망과 좌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왜 존재하며 왜 그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와 허탈함에 빠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물론 어떻게 어떻게 이겨내고 또 다시 힘을 내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연약한 인간인 목회자는 정말 힘에 겨울 수 밖에 없고, 그 상처 때문에 더 나은 목회자가 되는데 심각한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의 소망이 좌절되고 맙니다.
물론 목회자가 그저 자기가 하는 일에 혼자 만족하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즐기며,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고서 교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너무 힘들 때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제가 하는 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는 그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냥 성도들이야 어떻든 그저 내 일을 즐거워하고 영광스러워 하면서 나만 생각하면서 목회할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는 물론 하나님의 종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성도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있는 사람인데 그저 자기가 하는 일 자체를 즐기고 거기 만족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본연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요. 이것은 마치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열심히 강의를 하면서 ‘나 참 강의 잘 한다’고 만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학생들은 다 졸고 있고, 수업 언제 끝나나 딴 생각만 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만약 우리가 이런 선생님을 닮은 목회자를 바르고 훌륭한 목회자라고 말할 수 없다면 한 사람의 좋은 목회자를 만들고 세우는 데는 성도들의 역할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역할이란 그래도 목회자가 바른 길을 간다고 판단될 때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거기 귀를 기울여 주며 그 말씀이 가리키는 곳을 목회자와 함께 바라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지자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어 보니 이런 사람들이 없다고 여겨지거나 너무 드물다고 생각될 때, 그 때만큼 힘들 때가 없습니다. 그 외로움과 좌절감, 그리고 허무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감정들을 품고서야 정상적인 목회자의 일을 해 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누구도 지지해 주지 않고, 그 누구도 마음을 써 주지 않는 상태에서 사역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반대자와 핍박자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받을 오해와 손해, 불편함을 무릅쓰고 그와 함께 해 주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를 알아봐 주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의 가치를 위해 함께 헌신한 사람들 속에서 더욱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갔습니다. 그 교회가 바울을 바울되게 하는 요람과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좋은 성도들이 참으로 좋은 목회자를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성도들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종다운 종들을 세워가신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한 교회 안에 두신 저와 같은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을 위해서도 작은 부분 헌신해 주십시오. 큰 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가 가는 길이 그래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면,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도 성경에서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 주시고,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 더 마음과 생각을 더해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그만큼만 헌신해 주시면 됩니다. 거기다가 그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간다면 그것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는 없겠지요.
개인적인 이야기와 질문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냥 한 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제 설교가 눈뜨고 듣지 못할 정도로 지루하고 들으나 마나일 정도로 맹탕이지는 않은가요? 그리고 너무 하나님의 말씀과 달라서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시험에 들지 않는 길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가요?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신의 설교를 가지고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 자체가 외람되지만, 때로 저는 설교를 하다가 문득 제 설교가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솔직히 제가 많이 힘들어서 이런 질문까지 드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 설교와 가르침이 그 정도로 엉망은 아니라면, 그래도 바른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되신다면, 꼭 한 가지만 여러분에게 조금은 비밀스럽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교회를 위해서 거룩한 바람잡이가 좀 되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계속해서 그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여러분이 맡아 주시면 부작용도 적고 그럴 것 같아서 힘든 줄 알면서도 이렇게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주일오전예배 중에 주무시는 분이 너무 많은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도 피곤하면 잠시 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매 주일, 설교 시작과 동시에 입신의 경지에 빠졌다가 설교가 끝나면 다시 이 세상으로 되돌아 오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정말로 양해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이 문제가 습관과도 연관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라도 이 문제를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자연스러운 기회가 생기면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서 공론화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목회자인 저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 해 주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들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사실 기본 중에서도 기본인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절대로 교회다운 교회, 좋은 교회로 세워질 수 없고 성도들 또한 그럴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계속해서 이 문제를 조금 무겁게 생각해 주시고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영적인 잠과 무감각함에서 깨워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바로 여러분부터 더욱 더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해 주시고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공동체 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평신도 따로 목회자 따로인 그런 공동체가 아니고 목회자는 성도를 세우고 성도는 목회자를 세우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우리 광현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로 인해 더 성숙해지며 더 강건하여져 가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복을 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