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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8장 18-23절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거의 모든 곳에서 힘든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고린도에서도 그랬지요. 거기 사는 온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의 입지가 더 분명해 졌습니다. 이제는 유대교와 대등한 입장에서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바울은 단 한마디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갈리오가 다 알아서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더 편안하게 고린도에 머물고 싶은대로 머물 수 있었고, 전하고 싶은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8절을 보면 거기서 더 여러 날 머물렀다고 하는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머물고 싶은만큼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전부다 그 고소를 통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법적으로는 유대교와 똑같은 지위를 얻었던 덕분이었으니까요. 사도행전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며 들려주고 있는 것이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도 중간 중간에 어려움은 있습니다. 오해도 있고 핍박도 있고 손해도 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정말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것들입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삶을 살다가 당하는 어려움들과는 격이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칭찬과 영광을 가져다 주는 영원히 가치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런 일들은 그저 임시적인 것입니다. 결론이 아니라 결론으로 가는 중간단계에 거쳐가는 정류장들 같은 것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정류장 몇 개가 내 맘에 들지 않고 조금 불편하다고 불평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사는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중간정류장을 마지막 목적지와 혼동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마지막 결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참 성도들에게 영원한 영광과 안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중간 정류장들의 이렇고 저런 모습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서 마지막 까지 믿음의 발걸음을 옳겨 간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발걸음이 끝나는 날, 가장 크고 빛나는 영광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참된 성도들의 삶의 결론은 100퍼센트 해피엔딩입니다. 우리가 중간에 만나는 이렇고 저런 일들을 모두가 다 그 마지막 모습을 만들어 내시고, 또 그런 우리들을 통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입니다. 믿음 안에서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조금 더 멀리 그리고 더 크게, 그리고 잠정적인 것들로 바라 보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섭리하는 삶이고 또 이 세상이니 충분히 그러셔도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간 성도의 삶에는 마지막 낙심과 실망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에 머물만큼 충분히 머문 바울은 이제 시리아, 그러니까 유대 땅의 북쪽 지역을 향해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명절을 지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시리아로 갈 때, 바울은 고린도에서 만난 두 명의 든든한 동역자요 후원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데리고 갑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길을 가는 동역자들은 얼마나 든든한 하나님의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름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사람이 가는 길을 함께 가면서 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문화는 다분히 보스문화입니다. 제일 꼭대기에 있는 한 사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 사람만이 대접받고 귀히 여기는 그런 문화가 뿌리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인자나 일인자를 돕는 조력자들이 되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칭찬해 주거나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중요치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부름받은 자리에서 얼마나 신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빛이 나지 않는 자리에서 신실했다면 빛나는 자리에서 그렇게 한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는 훨씬 더 상이 클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빛나지 않고 조금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 자리에서 신실하게 살며 일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장 크게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를 떠나 바울일행이 제일먼저 도착한 곳은 바로 겐그레아라는 곳이었습니다. 성경은 바울이 여기서 일찍이 서원한 일 때문에 머리를 짧게 잘랐다고 이야기 하는데요. 얼핏 보면 바울이 일찌기 머리를 자르기로 서원을 했고 그래서 이제 드디어 겐그레아에서 그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반대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꽤 오랜 시간을 나실인으로 지냈습니다. 몇 년인지 모르지만, 오래 전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기로 서원했고, 그 서원을 지금까지 지켜왔습니다. 이제 그렇게 서원을 한 기간이 다 끝나서 그 동안 나실인으로 살기 위해서 자르지 못했던 머리를 자르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나실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평생을 나실인으로 지내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특별한 기간동안만 나실인이 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개 나면서 부터 나실인은 삼손이나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기간을 정해놓은 나실인들은 스스로가 원해서 나실인이 되는 기간을 정해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뒤쪽에 속하는 나실인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실인은 자신을 특별하게 구별해서 특정한 기간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께만 헌신하기 위해서 술도 마시지 않고, 머리도 자르지 않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이렇게 자신을 절제하면서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신실한 사람이고 또 얼마나 맡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의 표현대로 열심히 특심이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열심에서 바울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가 더욱 더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기간을 정해서 나실인으로 헌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이 곳 저 곳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그가 나실인으로 스스로를 드렸을때 지켜야 할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아마도 그는 처음 스스로 기간을 정해 나실인이 되겠다고 헌신했을 때, 그것을 알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에는 전문가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당히 긴 기간을 나실인으로 살기로 헌신했고 그렇게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한결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쉬울 것 같아도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저 한결같기 위해서 노력하면 점점 느슨해지고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사람은 항상 익숙해져 가는 일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신실해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하지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마땅이 그렇게 살고 또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자신의 영적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그것만 목적으로 삼으면 중간에 익숙해지는 것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매일 매일이 똑같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똑같은 열심을 유지하고 열정을 유지하며 초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꾸 게을러지고 나태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일정기간을 특별하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기 위해서 헌신하고, 제대로 예배드리기 위해서 헌신하고, 또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헌신하고…. 이렇게 중간 중간에 평상시와는 다른 기간들을 집어넣어서 가끔씩은 신앙의 일상성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금은 다른 모습의 삶을 살기 위해서 기간을 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특히 무언가 특별한 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리고 신앙적으로 새로워져야 하며, 무언가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될 때, 따로 시간을 떼어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시간을 마련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들을 우리를 더욱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을에 집중적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무언가 답답하고 막힌 것 같다고 생각될 때가 있으시지요? 영적인 성장이 정체되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으시지요? 이상하게 무언가에 계속 집착하게 되고 얽매이게 될 때가 있으시지요? 그런 때가 바로 여러분이 더욱더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헌신해야 할 때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오시는 싸인입니다. 그런 마음의 싸인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럴 때는 스스로 기간을 정하셔서 하나님 앞에만 서 있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시간과 삶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을 굉장히 기뻐하십니다. 편안할 수 있지만, 충분히 다른 일 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생각하며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정말 기뻐하십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을 감당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일이 필요성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자신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실인으로 구별하여 드렸고, 그래서 겐그레아에 와서야 그 기간이 끝나 머리를 깍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겐그레아를 떠난 사도 바울은 에베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인데요.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이 여행초기에 갈라디아 지역을 거쳐서 에베소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으셨고 그래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주 편안하게 에베소로 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인도하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 앞에서 겸손할 때, 우리 영혼과 삶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선 성령님의 뜻에 굉장히 민감해 집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 앞에 겸손한 사람은 우선 성령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으시는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길은 가려고 하지 않고 열어주시는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때로 내가 원하는 것과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를 때, 내 마음과 생각을 접고서 성령님께 순종합니다. 그렇게 하고서 성령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라도 길이 열리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굳이 자신의 계획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뜻과 계획보다는 항상 하나님의 계획이 더 선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 간 바울은 거기서 굉장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거기 가자 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다른 곳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곧장 회당으로 달려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시작했는데 그 곳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너무나 좋아하면서 거기 더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꼭 가야할 길이 있었기 때문에 훗날을 기약하고서 에베소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예전에 하나님께서는 에베소보다 마게도냐 지역이 더 급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그리로 보내셨겠지만, 이제 이렇게 에베소가 복음을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되자 이제는 바울을 다시 그리로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막으시는 것이 반드시 끝까지 막으시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은 아니니까 그렇게 하시는 것이고, 더 좋은 때가 있으니 그렇게 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심중은 다 읽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너무 원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신다면 그렇게 하시는데는 다 이유가 있고, 그것이 더 선하기 때문이라고, 또 원하신다면 언젠가는 그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팔레스타인의 항구인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거기 도착하자 마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예루살렘 교회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교회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는 곧장 다시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안디옥이 바울의 선교기지였고 그래서 여기서 부터 다시 선교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의 여행은 이렇게 지체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바울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셨던 그의 삶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더 이상 바로 눈 앞만 보고 살지 마시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으면서 이 세상을 좀더 크고 넓은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는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노력을 기울이셔서 뒷걸음질 치거나 무감각해 지지 않는 신앙을 유지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항상 명확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며 풍성하고 변함 없는 그런 삶이 되어갈 것이고, 또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이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과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