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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9.25. 주일오전 - 자녀들아 아비들아2(에베소서 36)


20160925SM (#1).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6장 1절-4절

설교주제 : 부모는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책임이 있음을 알게 한다. 



  1. 들어가는 말


지난 주일에는 부모와 자녀 중에서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무가 무엇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그 의무는 바로 ‘순종’과 ‘존경’이었습니다. 자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부모에게 최선을 다해서 순종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그 마음 속에는 부모를 향한 존경과 존중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의 권위 밑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또 존중하는 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습을 몸과 삶으로 배우게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엄청난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덧붙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자녀된 성도 여러분, 꼭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부모로서 공경하십시오. 힘들고 까다로워도 말이지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니 꼭 그렇게 하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또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것인데요. 사실 이 문제는 자녀를 키우는 우리 크리스챤 부모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면서도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니 믿는 부모로서의 저 자신의 부모노릇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자녀들에게 부끄럽고 또 하나님께는 더 부끄럽습니다. 저의 부족한 부모노릇에 비하면 아이들이 저 정도로 자라 준 것만해도 고맙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믿는 부모들이 저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부모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책임은 어느 정도 잘 했다고 자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대로의 부모역할이었는가 하고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턱 없이 못미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이 되지요. 그렇지만 이미 늦은 것은 없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으실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절대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의 곁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자녀들의 부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믿는 부모로서의 역할도 끝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녀들을 떠나는 그 순간,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부모로서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모가 침상에서 보여준 마지막 모습 때문에 마음을 고쳐 먹고 실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모로 살아가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살필 하나님의 말씀은 짧은 한 구절입니다. 주님은 딱 이 한 구절만 부모들에게 주셨습니다. 부모된 성도님들은 아이들이 어리거나 다 자랐거나 상관 없이 아얘 외워 놓으셨다가 내가 믿는 부모로 자녀를 바르게 대하고 기르고 있나 체크하실 때 그것을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판단하시고, 또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방향을 잡는 나침반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1. 아비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면 안된다. 


4절 말씀은 ‘아비들아!’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이 말씀이 아버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아비’는 부모의 대표로서 여기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 당시 문화하고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저께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작은 남자아이 하나하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서 피식 웃은 적이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과자를 사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했을까요? “안돼. 엄마한테 혼나.”라고 했습니다. 그 집도 그런 것 같았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권한이 이미 엄마한테로 넘어간 듯 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 저도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 그렇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굉장히 씁쓸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자녀교육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이미 엄마들에게로 많이 넘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자녀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모두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대표적으로 아버지를 부르면서 부모들을 교훈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주로 아버지에게 해당되는 그런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은 어머니 보다는 아버지인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런 가정들이 많지만, 시대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남자들이 아버지의 역할을 생각할 때 사랑과 자비, 부드러움이나 이해력 같은 말들이 아니라 엄격함과 완고함 같은 말들을 떠올리는 경향이 더 강했습니다. 대학시절 교회 후배들 중에는 자신의 부모님들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자녀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주로 아버지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희 집만 보아도 그랬으니까요.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의 로마사회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에는 여성들과 아이들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남자의 소유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들을 얼마나 함부로 대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4절을 통해 말하고 있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똑같이 귀기울여야 할 말씀이었지만, 특별히 아버지들이 귀 기울여야 할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고 말이지요. 


사실 부모가 부모로서 살고 부모의 역할을 할 때,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은 자녀를 분노하게 하는 일 말고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성경은 다른 것은 다 놓아두고 이것 한 가지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더 많은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지만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이것 하나를 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화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녀들을 키워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자녀양육의 원리입니다. 


꼭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모는 자기 자녀를 함부로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원칙 없이 대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분노하게 되고 마음과 인격에 상처를 입게 되고 결국 자녀들의 인격과 행복도 망가뜨리고, 사회의 건강함도 해치게 되니까요.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만들면 안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면 우리 자녀들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바르게 섬기는 그런 사람들로 성장해 가고 자신의 삶을 복되게 만들어가는 일에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의 의무가 무엇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자녀가 자라는 동안 그것을 자신의 몸과 마음의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 자녀들은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경외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억 나시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게 복된 삶의 자리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중요한 이유들 때문에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또 부모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만약 자녀가 부모에게 분노하고 부모 때문에 절망하게 되면, 그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기 보다는 반항하는 자녀로 자라기가 쉽습니다. 또 부모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굉장히 어려워 지지요. 그러면 이 자녀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바르게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 때문에 마음에 분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기쁘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신앙이 굉장히 반항적이 되고 냉소적이 됩니다. 또 하나님을 마치 말을 듣지 않으면 무섭게 매만 드시는 그런 아버지로 오해합니다. 또 그 자녀가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에는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하나님께 되돌려 주기도 합니다. 일부러 하나님을 모독하고 가족들이 예수믿는 일을 방해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반기독교적인 사상가들 중의 상당수가 지나치게 엄격한 크리스챤 부모들 밑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부모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좋은 신앙인이었을지 몰라도 자녀를 양육하면서는 스스로 이 원리에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의 부작용은 또 있습니다. 그것이 자녀의 실제적인 행복을 빼앗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부모 중에 자기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다들 내 자녀는 행복했으면 좋겠고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합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그게 우리 모두의 바램이 맞지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녀를 분노하게 만들면, 그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기가 굉장히 어려워 집니다. 부모에 대한 분노와 반항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자녀는 그 계명에 주어져 있는 복된 삶과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절대로 우리가 그렇게 만들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믿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노엽게 하면서 양육했기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예수를 믿는 부모 여러분, 절대로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방식으로 자녀를 양육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고 피해야 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녀양육의 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댁에 가셔서 한 번 자녀들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멀리 계시면 전화라도 한 번 넣으셔서 물어 보십시오. 혹시 내가 너를 키우면서 너를 화나게 한 것이 없었는지 말이지요. 부당하게 상처주고 함부로 대해서 상처를 준 적은 없었는지 말이지요. 혹시라도 있다고 말하면 진심으로 사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자녀의 분노를 풀어주십시오. 그러면 그 자녀는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갈 것이고 그만큼 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러면 자녀는 노하지 않는다. 


다시 4절로 가셔서 다함께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또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고, 두번째는 자녀들을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놓치면 안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과 그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서로 정반대가 되는 자녀 양육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써 우리 자녀를 노엽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자녀 양육의 방식과 목표가 내 생각과 내 감정, 그리고 이 세상의 기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가르치고 양육할 때는 그저 자신의 본능적인 감정에 충실해서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양육하고 있으니, 자기 부모를 신앙의 가장 중요한 선배로 바라보며 자라는 자녀들이 상처와 실망으로 마음 속에 분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 자녀를 ‘오직’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려고 한다면 우리 자녀가 우리에게 상처받고 분노하게 되는 일들은 대부분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를 그렇게 가르치고 또 양육하려면 우리가 미리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목표와 모습은 어떤 것인지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적어도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그런 사람들 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말이 우리 자녀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잔소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가르치고 또 양육하려는 성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던 하나님을 흉내내려고 애쓰면서 자녀를 양육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어떻게 키워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오래 참아주시고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상태와 수준을 사려 깊게 헤아려 주셨고 우리를 완고하고 거칠게 다루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반항하고 하나님을 거부할 때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의 뒤치닥거리까지 해 주시면서 우리를 천천히 이끌어 주셨습니다. 또 마음의 상처까지도 만지시고 고쳐 주시면서 우리를 양육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있어도 하나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실 때, 절대로 바르지 않은 것, 어긋난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바르고 선한 것,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만 우리에게 요구하셨고, 또 결국에는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들만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하려는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할 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을 흉내내려고 애쓰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은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는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대로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주셨던 그 방식을 흉내내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들 밑에서 자라난 자녀들은 그 마음에 부모들 때문에 분노를 품고 절망하게 되는 경우가 그만큼 드물어 지는 것입니다. 그 일이 우리 자녀의 인격과 영혼과 그리고 삶 속에 얼마나 복된 영향을 끼칠지는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6. 결론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우리 자녀에게 그 어떤 상처도 주지 않고, 우리 때문에 단 한 번도 노여움에 빠지게 만들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면에서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인격과 성품도 모난 구석 투성이 이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부모로서의 결함이 어떻든지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의 교훈과 훈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던 그 방식대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려고 애쓴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들 때문에 자녀들이 입은 상처와 가슴 속의 분노는 충분히 치료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우리들의 모습은 우리 자녀들의 영혼과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하는 은총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 험하고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원리와 가치가 아니라 성경의 가치와 원리대로, 그리고 우리의 모나고 거친 본성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소명 중의 하나이고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복되게 하는 일이고, 또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런 부모로 사는 일은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일이 될 것입니다. 


부모인 성도 여러분, 우리 힘을 냅시다. 우리 자녀가 어리든 그렇지 않든, 지금 예수를 믿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부모노릇에 충성하십시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하십시다. 주님은 분명이 그 수고를 가치없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고 우리 자녀들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은 찬송가를 함께 부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찬송가 564장입니다.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키우려는 우리의 수고와 싸움을 통해 주님 면류관의 보석처럼 빛나게 될 우리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고 기대하면서 함께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