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욥기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꾸 욥의 친구들 속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저에게는 많이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모습이 반면교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평생 감당해야 할 일이 방향이 잘못될 때, 어떤 일그러진 모양을 가지게 될지를 보는 일은 마음에 참 많은 부담이 됩니다.
목회자란 참 독특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란 어찌 보면 성도들에게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야 참으로 쓸모있어 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는 평상시에 성도들의 신앙을 인도하고 지도하며 격려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해야 하고, 그럴 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일을 하다 보니까 뭐랄까 이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고, 그것 때문에 이 일을 제대로 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는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너무 많이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거기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거기에 익숙해지는 법입니다. 성도들의 고통이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자꾸 그 분들의 어려움에 제가 익숙해져 갑니다. 당사자는 정말 많이 힘들어 하는데 말이죠. 둘째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제가 그 분들의 고통을 제대로 모르고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장벽은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하는 임무를 지닌 저에게 정말 커다란 장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마음 없고, 공감 없이 성도들을 위로할 수는 없는데, 남의 고통이라는 것이 접하면 접할수록 더 분명하게 느껴지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가니 참 난감하고 또 죄송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저에게 이런 면에서 반면교사가 되어 주었다면 이번에 욥기를 다시 읽는 저에게 욥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어서 참 많이 유익합니다. 정말 욥이 이렇게 저렇게 말한 표현 하나 하나가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고 정직한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묻고 또 물으며, 자신의 고통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영적인 태도가 참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욥의 기도를 닮은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구요.
엘리바스의 두번째 대답을 들은 후에 욥은 그에 대한 응답 중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었으리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이것이 욥에 자기 친구들에 대해서 참으로 안타깝게 여긴 점이었습니다. 욥은 적어도 친구들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누구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은 때로는 상처에 또 다시 상처를 내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우선 고난 당하는 사람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자가 되어주고 격려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들의 짐을 나누어 져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게 우선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내려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우리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아프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거나 그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다가가시고 그 아픔을 함께 느끼시고 또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그저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은 섣불리 다른 사람의 인생의 재판관과 선생이 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해 주어야만 할 때도 있겠지만 언제나 자신을 그들의 옆에 있는 사람으로 머물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장 18절 이하입니다.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욥에게는 그 어떤 사람도 도움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직접 찾습니다. 자기 인생의 증인과 또 중보자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께 ‘신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야기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욥의 결백함에 대해서 알려 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너무 단정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개별적입니다. 인생은 절대로 모두의 인생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일반적이지가 않습니다. 대개 큰 틀에서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지요. 그래서 마치 그 사람의 삶도 별 다를 것이 없다는 듯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억울해 하며, 답답해 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탄원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러지 않아도 힘든 그 사람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더해주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만이 인생의 재판관이 되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옆에서 바라봐 주며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옆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는 이 역할을 하기에도 벅찹니다.
우리 모두가 사람들의 옆에서 살아가면서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위로자가 되어주는 그런 겸손하고 따뜻한 삶을 살아서 이 세상을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흐르는 곳이 되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