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6.02.14. 청지기 헌신예배 - 직분을 얻으려 함은



20160214SE (#1).mp3.zip





본   문 : 디모데 전서 3장 1-13절





이미 알려 드린대로 오늘과 다음 주일은 2016년도 청지기 헌신 주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오후예배 시간을 이용해서 오늘은 함께 청지기 헌신예배를 드리고, 다음 주일 오후예배때에는 세미나를 통해서 좀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청지기’라는 말은 ‘제직’이라는 말의 뜻을 좀 더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말이지만, 이 청지기라는 말 속에는 ‘모든 맡은 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교회의 구석 구석에서 어떤 모양으로건 교회를 돌보고 세우는 일을 하는 모든 분들이 전부 다 청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분이 있건 그렇지 않건 말이지요. 그래서, 청지기 주일은 제직들을 위한 정해진 날인 동시에 성도들 모두를 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서 청지기가 아닌 사람들은 없으니까요.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한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직분에 대한 말씀들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직분이 참 다양해 졌습니다.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안수집사가 있고, 권사가 있고, 서리집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디모데 전서가 쓰여졌던 초대교회 시대에는 교회의 직분은 감독과 집사 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감독 속에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가 포함되어 있고, 그 당시 집사가 오늘날로 하면 안수집사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교회에서는 여기에 권사라는 직분이 더해진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서리집사는 성도의 숫자가 많아지고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안수집사나 권사로 세워지기 위한 검증과 준비를 거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직분이구요. 그 직분에 성경에 나와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설왕설레 말이 많지만, 저는 그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감독과 집사 이외의 직분들이 결국 교회의 역사 속에서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 직분들은 분명히 교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세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겸손하게 주고 받는다면 그 직분들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가장 유익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감독과 집사라는 두 가지 직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씀들을 꼭 그 직분에만 적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본문 말씀이 감독과 집사들에게 하시는 말씀들은 결국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만 하는 그런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들으면 될 것 같습니다. 저와 장로님, 그리고 안수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은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나머지 분들은 또 자신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들으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어느 부분에선가는 교회를 위한 리더십의 일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청지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직분의 원리, 그러니까  직분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함이로다”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저나 우리 장로님같은 감독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직분의 본질상 모든 직분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가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저는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건 하나님의 일을 맡게 된다면, 이 말씀이야 말로 항상 우리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는 원칙이 되는 그런 말씀이어아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분을 맡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그 직분을 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직분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꾸 어떤 역할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많은 일을 하고, 또 그 일들을 잘 하고… 물론 직분을 맡은 사람이 게을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맡은 일을 잘 하려고 노력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은 직분을 맡는 것, 그리고 그 직분을 행하는 것은 다름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여기서 ‘사모한다’라는 말은 아주 강렬한 말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아주 강한 욕구를 가진다는 그런 뜻의 단어이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바로 이런 말을 사용해서 결국 누군가가 직분을 맡고 그 직분을 감당한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인 즉 하나님으로 부터 교회를 위한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을 갈망하는 것처럼 선한 것을 갈망하는 상태가 되어야 하며, 그래서 선한 것만을 행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시는 일을 통해서 교회에 선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생각과 소원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참된 유익에 반대되는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선을 추구하고 선을 행하려면 우리는 이 선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흔히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법들은 효과적인 방법이지 선한 방법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가지고 선하냐 그렇지 않으냐를 평가하려고 하면 진짜 선한 것을 찾고 구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교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장 커다란 원칙을 어기게 됩니다. 그래서 직분자들이나 교회의 일을 맡은 자들은 어느 정도는 기존의 사고 방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고,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각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본문은 감독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먼저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7절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는데요. 7절과 연결시켜 보면 적어도 교회의 대표하는 감독의 직분을 맡으려면 누군가의 비난을 받을만한 그런 삶을 살면 안되는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서 교회 안 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도 그 삶을 통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감독들, 그러니까 목회자와 장로들은 대외적으로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정말 걱정할만한 수준이 되어 버린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끄럽게도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나서서 비난을 받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 자신만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욕을 먹고,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십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성도는 자신이 공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교회의 한 사람으로 존재하며, 세상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과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니까요. 이것은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반드시 짊어져야만 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짐을 질 때, 그저 욕이나 먹지 않는 수준으로 살겠다는 목표를 세우면 안됩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교회 안에서건 교회 바깥에서건 칭찬받고 인정받는 삶을 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에는 두 여인의 남편이 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이 그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절제와 신중 그리고 단정함입니다. 절제는 나에게 100이 주어지면 그것을 다 사용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특히 자유의 사용에 있어서 그렇지요. 내 자유라고 해서 다 사용하면 안됩니다. 죄가 아니라고 해서 다 해도 되는 것도 아니구요. 제가 미국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탄탄한 기초 시스템 만큼은 참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미국의 프로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 프로야구는 처음부터 메이져  리그에서 뛸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마이너 리그를 돌게 한다고 합니다. 실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는 동안에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공인으로서 얼마나 절제력이 있고 자기 관리능력이 있는지를 보고, 그 일에 있어서 결격사유가 보이면 메이져 리그로 올려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메이져 리그로 올라가면 그 사람이 공인으로서 실수하거나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단지 야구선수 생활을 위해서도 수년동안 인격적인 검증을 받고 자기 조절능력을 갖추어야 비로소 선수다운 선수가 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통해서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 그리고 동시에 사회인으로서 세상에서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해도 되는 일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연습을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삶의 자리로 가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전히 부족하고 흠많은 우리의 삶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선을 위한 도구가 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또한 신중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정하는데 있어서 너무 경솔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됩니다. 물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하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너무 가볍고 신속하기 보다는 정말 진중해야 합니다. 말을 한 마디 하고 행동을 하나 하더라도 똑같습니다. 너무 빠르게 말하거나 너무 가볍게 행동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오해를 하게 되거나 상처를 입게 되고, 또 필요없는 갈등도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의견을 따르고 그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서 자기 자리나 태도를 정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는 자기 성향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공적인 일을 위해서는 그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꼭 필요해서 자기 주장을 하더라도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구요. 이것이 바로 신중함입니다. 


또한 감독은 단정해야 합니다. 단정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행동이 질서잡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의 삶과 행동이 질서잡혀 있으려면 그 사람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신중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단정함은 절제와 신중함이 맺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이, 그러니까 목사와 장로가 질서잡혀 있지 않으면 교회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질서 없는 사람들이 지도력을 행사하면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즉흥적이고 내키는 대로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되고 그러면 교회도 덩달아 무질서해 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측 가능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과 반대가 되는 길을 선택할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사람이 절제와 신중함이 만들어 내는 원리와 원칙을 지켜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행보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인가는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성도들 또한 예측가능한 질서에 따라 살고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교회를 어지럽히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이 목회자나 장로가 되는 중요한 요건이라는 점이 의외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합니다. 나그네는 단순한 여행자들이 아니라 그 당시 가장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의 대표격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끼니도 제대로 이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나그네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나그네였지요. 그래서, 이 부분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라면 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머니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저는 돈에 대해서, 신앙은 좋아 보이지만 남에게 베푸는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인색한 많은 분들을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보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의 경건에 대해서 인정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돈에 대한 그의 태도는 곧 땅에 속한 것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는 것을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보는 그런 신앙입니다. 물론 우리가 온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 모두를 다 책임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남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경건은 참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판단이니까요. 더 자주, 그리고 더 크게 여러분의 주머니를 여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여러분의 귀중한 재물을 더 많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경건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술과 구타의 문제이지만 이 문제도 워낙 명확한 것이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관용하며 다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용은 친절하고 신사적인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이나 영어성경들을 보면 관용은 다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나오는 폭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이 이 말을 관용이 아니라 ‘친절이나 신사적인 태도’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을 그 어떤 종류의 폭력이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부드러운 마음과 친절함을 잃지 않고 기다리고 설득해야 합니다. 힘을 가지고 일을 이루는 방식은 절대로 신앙적인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감독은 다투어서는 안됩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자꾸 다투려 들거나 다투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자꾸 다투려 들고 심지어는 다투는 것을 좋아하게까지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심리 때문입니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즐거워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옳아야 하고 내가 이겨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을 나의 적으로 보고 그 사람과 싸우게 되고 또 이기려고 기를 쓰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말 많은 교회에서 이 이기고 지는 문제 때문에 교회가 어지러워지고 커다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싸우면요, 누군가는 이기겠지요. 그래서,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자기가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인정받겠지요. 그렇지만 그 승리는 과연 주님의 승리일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기뻐해 주시고 그것이 나중에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를 더 영광스럽게 해 줄까요? 오히려 정반대이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절대로 교회 안에서는 다투지 마십시오. 남과 겨루어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목소리를 높이지 마시고, 될 수 있는 대로 낮추십시오. 교회 안에서는 이기는 것이 못난 것이고, 이기는 것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탄이지 같은 성도가 아니니까요. 


그 다음 문제가 바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생기면 그것을 위해서 다른 것은 기꺼이 희생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그 돈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은 다 희생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돈만큼 사랑하기 쉬운 것이 없습니다. 돈이란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을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악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 많은 악을 끌어드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영역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의 지도자는 돈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돈에 큰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고, 무슨 일을 할 때 돈으로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악이 끼어듭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이 섬김을 받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합니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이렇게 바뀌지 않으면 결국 그것 때문에 신앙이 힘들어 지고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하게 되기가 쉽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깨끗한 양심을 지켜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돈에 집착하며 돈을 위해서 살게 되면, 아무리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도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복된 비밀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8절부터는 특히 집사들에게 요구되는 인격적인 자질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8절 처음에 나오는 ‘이와 같이’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이 감독들에게 요구되는 자질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집사들이 감독들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성도들을 만나고 섬기는 일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정중함, 일구이언 하지 않을 것, 정숙하고 남을 모함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덧붙여져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직분자 여러분. 교회는 일반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하는 그런 곳입니다. 이익을 추구하고 성공을 추구하고, 효율을 추구하고 그래서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고 또 무언가 역할을 맡은 성도들에게는 세상이 선호하는 자질이나 능력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인맥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재산이나 학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시지요. 똑똑하고 머리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본 모든 내용들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로 직분자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려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자신을 통해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무언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맡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언제나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직분자 여러분. 성경을 따라, 그리고 사도 바울을 따라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교회를 여러분에게 그런 곳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속사람을 속속들이 다루어 내는 곳, 시간이 흐를 수록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가게 하는 곳, 그리고 악한 것은 그 그림자라고 할지라도 끊어 버리고 언제나 선한 것만 추구하는 곳, 그런 연습을 하고 그런 일에 있어서 진보를 보이는 그런 곳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섬기려면 몸을 움직여 수고도 해야 하겠지만 그 일을 통해 일만 하시지 말고 꼭 이런 고상하고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정말 복된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청지기 여러분, 직분은 결코 가치없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우리의 성품과 삶을 다루어 내며 잘 감당해 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생을 사는 동안 확신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맡은 일을 하시는 데도 열심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여러분 자신을 영광스럽고 고상하게 다듬어 가는 기회로도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주신 직분 안에서 자신을 다루어 내며, 언제나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복되고 영광스러운 청지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과 열심을 다하게 하소서.
  2. 주님 맡기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시고,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3. 주님의 교회를 더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