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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2.19. 금요기도회 -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사도행전 141)


※ 녹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 사도행전 22장 17-23절




누군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데 짧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길게 하는데는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길게 늘어놓는 듯이 보이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에는 그 이야기의 내용 말고도 그 내용과 더불어 그 사람이 진짜로 전하고 싶어하는 다른 것도 함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겠지요? 사도행전 22장이 바로 그런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읽으셔서 아시겠지만, 사도행전 22장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위해서 선택한 말들은 굉장히 신중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이 연설을 시작하면서 청중들을 향해서 ‘아버지와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도 지금 나를 헤치려고 하는 당신들과 똑같이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신이 지금과 같이 바뀐 이유를 알려주는 일도 잊지 않았지요. 바울은 다메섹에서 자신을 도와준 아나니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그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불었다는 사실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은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른 도시로 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야기들의 맥락은 똑같습니다.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생각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무시한 적도 없고, 유대인들을 유대인 아닌 사람들처럼 만들려고 한 적도 없고, 스스로 유대인인 것을 부끄러워 한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당신들처럼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만난 사람들 또한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며, 나 또한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며 예루살렘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고,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즐겨하는 당신들과 똑같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3절부터 17절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야기의 내용과 더불어서 그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잠시 로마서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많은 성경학자들이 로마서가 쓰여진 시기를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끝나가는 57년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오기 직전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바울이 자기 동족들에 대해서 얼마나 애틋하고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9장부터 11장이 그 부분인데요. 그는 유대인들의 구원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9장 1절과 2절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희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주된 소명일 뿐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동족들의 구원에 대한 타는 듯한 심정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구원과 동족들의 구원을 맞바꿀 수 있다고 여길 정도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동족들의 탈선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절대로 유대인들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을 핍박하고 여러분 죽음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자기 동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고, 어떻게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소원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헤치려는 동족들 앞에서 그토록 열심히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이유는 그러한 자신의 심정을 그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동족들에 대한 애틋한 소원이 깊었던 것은 단지 그들이 자신과 핏줄이 같거나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그들 속에서 예전에 모르고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보니 비록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동족들도 미워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더 애틋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게 가족이든 직장동료나 상사이든 자신의 신앙을 방해하고 또 신앙을 이유로 괴롭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좀 더 확대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교회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 분노를 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들과 맞서서 거친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바울의 모습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먼저 믿은 우리들의 바람직한 감정이나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가족, 내 동료, 나의 상사, 그리고 이 사회는 왜 그런 모습일까요? 왜 그토록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모독하고 있고, 가만히나 있으면 좋을텐데 왜 그토록 예수 믿는 일에 대해서, 이 소중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해서 반감이 클까요? 그 이유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옳은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싸워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까요? 


우리 주님의 방법은 주님을 적대하고 못 박아 죽인 세상을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자신을 거절한 예루살렘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게 누구이든 절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해 주지 못하고 힘들게 한다고 해서 그들을 향해서 그들과 똑같은 마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적대감과 반감을 품고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된 자리에서 오로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지금 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그 사람들의 자리에 우리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의 눈으로 봐 주셨기에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사람들을 정죄하게 하고 적대하게 만들 때,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 그리고 그 주님의 마음을 닮은 바울의 마음으로 되돌아 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진심이 조금은 전달되어서인지 그 날 성전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바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그런 분위기에 물을 끼얹었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유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너의 동족 유대인들은 너의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 부분부터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말인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셨다는 뜻이니까요.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유대인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자신이 그 일을 찬성하고 증인이 되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변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자신이야 말로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적임자가 아니겠느냐고 말이지요. 


그리고는 그 다음에 들려주신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 주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다시 한 번 떠나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낼 것이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듣고 있던 청중을 결정적으로 폭발하게 만든 말은 이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 대목에서 바울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소리지르면서 폭도로 변하게 되었을까요? 


원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저절로 이방인들에 대한 불타오르는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애굽, 블레셋, 페르시아, 바벨론, 그리고 지금 자신들을 통치하고 있는 로마 등.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수 천년동안 선민인 자신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이었고 그래서 멸망당해야만 하는 지옥의 불쏘시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들과 함께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지요. 그런데, 지금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택함 받은 백성인 자신들이 구원의 소식을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이방인들에게로 자신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이것은 과연 실수였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그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이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같은 사람이 그걸 모를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바울은 이 이야기를 일부러, 아니 해야하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이야기 속에 복음을 담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생각, 복음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됨의 회복’입니다. 모든 갈라지고 깨어진 것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성경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의 마지막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는 아마도 몇 주 후에 에베소서를 통해서도 한 번 다룰 것 같은데요. 복음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되고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가장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구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있어서 이 벽은 절대로 깨뜨릴 수도 없고, 또 깨뜨려져서도 안되는 그런 장벽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이 참 복음을 들으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이루려고 하시는 그 놀라운 일의 주인공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이 벽을 허물어 뜨려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적개심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구원이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세계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주신 이유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안타깝게도 그 이야기를 다 들려주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바울을 죽이겠다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하나로 회복하는 능력입니다. 아담이 범죄했을때 깨어진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회복시키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를 회복시키며, 사람들과 이 세상 만물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며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그 일을 하고 싶어하십니다. 바울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동족들을 향해서 무한한 사랑과 애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들도 자신과 같은 꿈을 꾸기를 바랬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그들도 자신과 꼭같은 꿈을 꾸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보면 어리석어 보이고, 그 앞의 이야기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참된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화해시키며, 이 세상과 사람을 화해시켜서 처음처럼 다시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꿈, 그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세상에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품고 계셨던 그 아름답고 완전한 그림의 단 한 획이라도 더 그리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그런 소망이 있습니다. 참 복음을 알고 믿는 사람은 그 복음의 마음으로 느끼며, 그 복음의 생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 복음의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누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불쌍히 여깁니다. 안타깝게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들 속에서 예전의 나의 모습, 그 안타깝고 어리석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은혜가 없었다면 자신의 모습일 수 있었던 그런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저녁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가슴 속에 새겨 주셨던 그 복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도 다시 한 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원수도 불쌍히 여기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하는 그런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을 따라 꿈꾸게 해 주셔서, 우리 모두가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 내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