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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2.26. 금요기도회 - 이는 로마시민이라 하니(사도행전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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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2장 24-30절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께서는 커다란 어려움 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대개 이런 분이 그렇게 되기가 쉽듯이 그래서 이 분의 신앙은 정말 굳건하기는 했지만 또 너무나 극단적으로 치우쳐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분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사실 그 설교 뿐만 아니라 그 교회 목사님은 그런 내용의 설교를 자주 하시는 편이었는데요. 그 설교의 내용은 사회에 나가 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싸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법적인 싸움은 벌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집사님까지 세 분이 동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자기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 이 집사님에게 다 뒤집어 씌워 오히려 고소를 했고, 그래서 결국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집사님은 그저 검찰에만 그 일을 맡겨 놓고서 자신의 결백함만을 주장할 뿐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바로 이것 때문에 이 집사님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수사가 진행되어 가면서 결국 이 집사님이 상대방의 잘못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 때 검찰은 왜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그 집사님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믿어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예는 조금 극단적인 예일 수 있지만 사실 성도는 이런 혼란에 자주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상식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며, 신앙 안에서 세상에 속한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이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질 때가 있는데, 때로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믿음으로 살고 순결하게 살고 싶어하는 성도들에게 이런 고민은 결코 작은 고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과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나서는 그야 말로 삶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완전한 변혁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욕심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서는 갖추기가 정말 쉽지 않은 조건을 약관의 나이로 갖추었습니다. 물론 그런 조건들 속에는 그저 타고난 조건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는 정말 어떤 면에서 보든 흠 잡을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알게 된 후 바울은 정말 정말 자신에 대한 이야기 하기를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기 이야기를 해야만 할 상황에서는 몇 번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나온 바울에 대한 정보를 모아보면 이렇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서는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혈통적으로 볼 때, 그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유서깊은 지파 출신입니다. 율법 규정대로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흠이 없었습니다. 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입니다. 평범한 유대교인이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율법의 의라는 기준으로 보아도 흠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다소 출신입니다. 헬라지역의 대도시 출신입니다. 집안도 꽤 영향력있는 집안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 덕분에 당시 헬라철학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가 헬라 철학에 대단히 조예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도 나와 있듯이 랍비로서의 교육은 가말리엘 밑에서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그 당시 양대 율법학파 중 하나인 힐렐학파의 창시자였던 힐렐의 손자입니다. 최고 중의 최고 밑에서 아주 엄한 율법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랍비들 중에서 가말리엘의 제자라는 것은 일종의 보증수표였습니다. 그는 이런 모든 일들을 30대 초반에 모두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게 된 이후에 바울은 이런 것들을 절대로 자랑거리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출신이나 신분, 지식와 열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이 이런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겨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찾던 모든 것, 그리고 그 이상의 비교할 수 없이 가치있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자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미 발견한 보물을 더 완전히 얻고 소유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진지하게 예수를 믿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은 이 이야기에 걸립니다. 바울이 저렇게 대단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그런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는데,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떠났다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이런 깨달음을 실제의 삶으로 옮겨내려고 하니 참 힘이 듭니다. 그러면 정말 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가,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이 다 버리고 바닥으로 내려가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자신이 지금 취직을 하려고 서류를 내놓았는데, 한 군데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 이것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이 지금 자신이 치과의사인데 다 버리고 바닥으로 내려가라고 하면 병원을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리석다고 여기실지 몰라도 당사자들은 굉장히 심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정말 예수님만을 붙들고 살아가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도 예수를 믿으면 자꾸 내려놓고 포기하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 요청을 아예 무시하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도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그렇게 해야하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오게 되어 있는 고민이 아닌가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랑으로 삼을 수 있는 모든 것, 소위 세상에서 살면서 얻은 조건들과 능력들은 모두 다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22장을 보면 바울은 그렇게 자신이 버렸다고 말하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 내어 다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족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로마의 천부장에게는 자신을 다소출신이라고 소개하면서 헬라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막상 동족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아람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면에서든 흠 잡을데 없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천부장이 자신을 결박하고 채찍으로 때리며 심문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어엿한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였는데, 유대인인 네가 어떻게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묻는 천부장을 향해서 자신은 나면서도 부터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천부장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하게 됩니다. 천부장이 바울이 로마시민인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서 그를 결박한 것은 당시 로마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정법을 어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그 동안 자신이 자랑거리로 삼아왔고 또 자랑하기 위해서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다 버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버리지 않고 다 가지고 있으면서 이렇게 사용하고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신앙 안에서 무언가를 내려놓고 버린다고 할 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바라 볼 때,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 답이 될 수 있는 성경의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는 디모데 전서 4장 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 중에서 그것 자체로 악한 것은 없습니다. 다 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만드시고서 좋다고 하셨고, 우리에게 주셨으니까요. 물론 그것 자체로 악하고 나쁜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 아니고, 인간의 악한 마음과 생각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선하지가 않고 이런 것들은 예외로 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그것은 최소한 중립적인 것들이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가 그것 자체를 반드시 거부하고 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머리를 받았으면 그 머리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더 지혜롭게 되어져야 하고 더 좋은 지식을 쌓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산을 주시고 돈을 주시면 받으면 됩니다. 좋은 직장도 좋은 성품도 이런 저런 능력도, 심지어는 열심이나 열정도, 성실함인 아름다운 외모도, 건강이나 화술도 주시면 받으면 됩니다. 그것 자체는 선한 것이니까요. 


제가 신대원에 다닐 때, 구약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이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성막 이야기를 하면서 성막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정말 고급 재료들이고 값진 것들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런 것들은 어디서 난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들을 광야에서 어떻게 구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보화’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가지고 나온 것이다. 나올 때, 애굽 사람들에게 요구해서 받은 것들이고 또 그들이 선물로 준 것이다. 그런 것들 중에는 분명히 우상숭배에 사용되던 것들도 있었을 것이고, 애굽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부적으로 사용하던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악세사리들은 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것들로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 그리고 세상에서 얻는 것들을 바라보고 사용하는 시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두고 두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명백히 악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 자체를 소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왜 가지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고, 얻었을 때 어디다 쓰려고 그러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어떤 것을 소유하는 것 자체나 혹은 그렇게 얻어지는 소유물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둘째, 그것을 얻고자 하는 이유가 우리의 욕심과 탐욕, 그리고 자랑하려는 마음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세째, 무엇보다도 그것에 기대어 그것을 자기 힘과 방패로 삼아 살아가기 위해서 그것을 얻고 또 붙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얻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우상이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얻는데 방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이 일이 쉬워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모든 것들은 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더 온전히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하며, 그 이유 때문에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막을 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보화’들을 기쁜 마음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이 그동안 수고해서 얻은 것이고, 그런 학대와 고생 끝에 그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지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들인지 알았지만 말이지요. 바울이 사용한 ‘버렸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가치 없게 여겨서 마치 쓰레기 버리듯이 버리고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힘이나 자랑거리로, 그리고 순전히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을 이루는 도구로, 마치 성막을 지을 때 사용한 ‘애굽의 보화’처럼 그렇게 참되고 가치있게 사용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균형있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목적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고 사랑하게 만드는 유혹도 이겨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애굽의 보화’입니다. 일부분은 우리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들이지만, 그것을 우리 삶에 주시는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일을 하며, 이웃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능이든 재물이든, 그 어떤 좋은 것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 삶의 탈선은 이렇게 수단으로 사용해야 할 것들을 목적으로 삼으려고 들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목적으로 삼는 순간 그런 것들을 주시는 하나님은 목적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지고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도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마니까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받으시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 보십시오. 물론 여러분의 삶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도 사용하시구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선한 것들을 선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들을 선하게 사용하려고 애쓸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우리들에게도 선이 되게 할 것이고, 선한 것들을 사용할 많은 기회들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한 것들’을 ‘애굽의 보화’처럼 사용하는 지혜롭고 선한 청지기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