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3.02.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예레미야 애가 4-5장)




20160302D (#1).mp3.zip






설교일 : 2016년 3월 2일 수요일





원래 세상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늙는 것이 더 서글프고, 화려한 도시가 쇠락하면 가장 비참하고, 사랑받고 살던 사람들이 그 사랑에서 떨어지면 더 못 견디어 합니다. 부자로 살던 사람들이 가난해 지면 그것을 더 못 견디게 되고요. 그런 점에서 유다의 멸망은 그 당사자들인 유다백성들에게는 더욱 더 비참하고 서글픈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 가운데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그야 말로 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제의 삶과 신앙도 그런 자부심과 자존심을 따라 갔던 것은 아닙니다. 껍데기는 그렇지만 알맹이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하나님을 섬기는 순종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껍데기들이 있는 한, 자신들은 결코 망하지도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고 그런 확신 가운데서 유유자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들만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겉이 아니라 속을,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보고 계셨습니다. 속이 완전히 비고 또 썩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화려하고 찬란한 겉모습, 그 자랑스러워 하던 껍데기를 부수셨습니다. 6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그 당시 유다를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죄악 가운데 있다고 표현하면서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는 사람이 손을 대지 않아도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사실 마지막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바벨론이 그들을 오랫동안 포위하고 그들을 가둬놓은 끝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 그 성 안의 처참함이 어떠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그 때의 처참함을 그렇게 말합니다. 들개도 젖을 주어서 제 새끼를 먹였지만 그 고고하던 유다백성은 알을 모래 속에 파 묻어 놓고는 새끼를 돌보지 않는 타조만도 못하다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는 그렇게 자비롭던 부인들이 나중에는 자기 자녀를 잡아 먹었다고 말입니다. 사실이었을까요? 역사의 기록을 보면 사실이었습니다. 정말 상황이 극한에 달하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는 것을 넘어서서 아얘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인간이라지만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은 그런 잘못을 저지른 당대에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5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하나님께 직접 죄를 저지른 세대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녀들, 그 손자들 세대는 남아서 그 죄악의 결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과 수치를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가 자신의 세대만 생각하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세대, 적어도 앞 뒤로 한 두 세대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세대의 잘못과 실패의 결과는 그 다음세대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한 세대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성공과 올바름의 열매는 최소한 그 다음세대까지는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삶이 맺는 열매가 가지는 특징입니다. 이것은 단지 영적인 부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저는 완전히 비관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조국의 교회와 우리 사회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또 앞으로 이 땅 위에서 살아가야 할 젊은이들이나 청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많이 미안합니다. 저는 정말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흐를 때도 있습니다. 어른 세대가 그저 자기만 잘 되면 된다고 살았습니다. 자기 가족, 자기 자녀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또한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만 큰 교회가 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 길로만 달려 갔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의 고통과 수치로 되돌아 오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어두운 이야기를 듣게 해 드려서 죄송스럽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관심이 없고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하겠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고통과 절망 중에도 예레미야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 기도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가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슬픔의 노래는 소망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유다의 하나님이고 그래도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바라보면서 비관하고 비판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못난 조국과 조국교회를 부둥켜 안고서 미워하지 않고, 탓하지 않고 기도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레미야의 애가가 그런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 나라, 그리고 이 땅의 교회와 자기 자신의 고통과 슬픔 앞에서 때로 분노하고 눈물흘리며 좌절하더라도 끝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탄식의 기도와 슬픔의 노래가 믿음의 고백이 되고, 소망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