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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3.29.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에스겔 24-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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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종종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고 또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고 말하지만 또 징계하신다고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냥 사랑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징계는 말구요. 물론 큰 징계가 그리 자주, 그리고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징계는 없었으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이런 생각들은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그저 불만이 아니라 억울한 감정이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든, 심지어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악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징계는 커녕 평안하고 부유하게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신경쓰면서 삽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잘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삶이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바로 하나님이 딴지를 거십니다. 그저 그런 것 같지가 않고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얘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나처럼 혼내셨다면 이미 그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만 삽니다. 아무 일 없이, 오래 오래 부자로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이게 현실이 아닌 것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들에게는 일종의 시험거리가 됩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일도 힘이 드는데, 이런 일들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심하게 흔들어 놓고 낙심시키기 때문입니다. 


24장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최후통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이 최후통첩은 하나의 비유 하나와 에스겔의 부인의 죽음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가마는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그 속에 녹이 쓸었지만 그 녹을 닦아내지 않은 가마솥이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솥에 물이 부어지고 밑에는 불이 지펴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좋은 고기와 뼈가 들어가 잘 고아집니다. 여기까지는 화목제가 드려지고 난 후에 제물의 고기가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기 위해서 삶아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어서 화목제가 잘 드려져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분위기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낼지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마솥 안에 있는 고기를 제물이 아니라 쓰레기로 취급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또하나의 비유가 이어지는데 그것은 고기와 뼈가 다 탈 때까지 불을 끄지 않고, 그렇게 가마가 빈 후에 다시 숯불 위에 올려놓아 그 안의 더러운 것들을 녹아 없어지게 하는 솥의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 지지 아니하리라”  


가마솥이 더러우니 그 안의 제물은 그 가마 때문에 더럽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더렵혀진 제물은 하나님께는 쓰레기에 불과하구요. 유다 백성들은 뒤늦게 그 가마의 더러움을 제거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너무 심하게 더러워져 버린 솥은 그들의 힘으로 깨끗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솥이 다시 깨끗해 질 수 있는 방법은 그 솥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쳐지는 것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부인이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례음식도 먹지 말고 울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후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때,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어질 때, 유다백성들의 모습이 자기 아내의 죽음 앞에서 음식도 먹지 못하고 울지도 못할 정도로 허탈해 하고 망연자실해 하는 에스겔의 모습과 똑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날이 오면 그제서야 그렇게 무시하고 배반하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엄청난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까지 징계하실 수 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유다 주변의 나라들을 보면 유다 백성들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우상숭배가 그들의 본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고, 유다를 잔인하게 다루기도 하고, 유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보면서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유다만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야 하며, 그것도 그렇게 심한 징계를 받아야 하나 생각됩니다. 아마 에스겔의 예언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장 이하의 말씀들을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벌 주실 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과 유다백성들에게 내를 징계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를 향한 징계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계의 목적은 유다 백성들을 다시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 나라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에게 내릴 형벌은 그게 끝입니다. 그 징벌은 그 나라들을 완전히 망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라 멸망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어찌보면 작게 작게 자주 자주 징계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조금 크게 여겨지는 징계들은 그 정도로 안되니까 한 번 크게 손을 대시는 것이구요. 그렇지만 징계가 아무리 커도 징계는 징계입니다. 징계는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경우, 하나님께서 자주 자주 작게 작게 손을 대시지 않으십니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마지막에 크게 손을 대십니다. 아주 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악인의 운명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 없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그들의 양심에 맡겨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참으셨던 모든 진노를 그들에게 쏟아부으십니다. 징계가 아니라 형벌을 내리십니다. 


우리는 징계를 불편해 하면 안됩니다. 징계는 자녀만 받는 것이니까요. 자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내버려 두시다가 마지막에 아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면 그것처럼 철딱서니 없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징계는 유쾌하고 행복하지 않지만, 그래도 징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고, 또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려는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신경 써 주시고 항상 돌봐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징계 받을 일조차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일 :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종종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고 또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고 말하지만 또 징계하신다고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냥 사랑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징계는 말구요. 물론 큰 징계가 그리 자주, 그리고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징계는 없었으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이런 생각들은 우리 주변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그저 불만이 아니라 억울한 감정이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든, 심지어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악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징계는 커녕 평안하고 부유하게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신경쓰면서 삽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잘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삶이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바로 하나님이 딴지를 거십니다. 그저 그런 것 같지가 않고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얘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나처럼 혼내셨다면 이미 그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만 삽니다. 아무 일 없이, 오래 오래 부자로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이게 현실이 아닌 것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들에게는 일종의 시험거리가 됩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일도 힘이 드는데, 이런 일들은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심하게 흔들어 놓고 낙심시키기 때문입니다. 


24장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최후통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이 최후통첩은 하나의 비유 하나와 에스겔의 부인의 죽음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가마는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그 속에 녹이 쓸었지만 그 녹을 닦아내지 않은 가마솥이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솥에 물이 부어지고 밑에는 불이 지펴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좋은 고기와 뼈가 들어가 잘 고아집니다. 여기까지는 화목제가 드려지고 난 후에 제물의 고기가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기 위해서 삶아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어서 화목제가 잘 드려져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분위기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낼지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마솥 안에 있는 고기를 제물이 아니라 쓰레기로 취급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또하나의 비유가 이어지는데 그것은 고기와 뼈가 다 탈 때까지 불을 끄지 않고, 그렇게 가마가 빈 후에 다시 숯불 위에 올려놓아 그 안의 더러운 것들을 녹아 없어지게 하는 솥의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겨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깨끗하여 지지 아니하리라”  


가마솥이 더러우니 그 안의 제물은 그 가마 때문에 더럽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더렵혀진 제물은 하나님께는 쓰레기에 불과하구요. 유다 백성들은 뒤늦게 그 가마의 더러움을 제거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너무 심하게 더러워져 버린 솥은 그들의 힘으로 깨끗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솥이 다시 깨끗해 질 수 있는 방법은 그 솥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쳐지는 것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부인이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장례음식도 먹지 말고 울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후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때, 유다 백성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어질 때, 유다백성들의 모습이 자기 아내의 죽음 앞에서 음식도 먹지 못하고 울지도 못할 정도로 허탈해 하고 망연자실해 하는 에스겔의 모습과 똑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날이 오면 그제서야 그렇게 무시하고 배반하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엄청난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까지 징계하실 수 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유다 주변의 나라들을 보면 유다 백성들보다 훨씬 더 악합니다. 우상숭배가 그들의 본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고, 유다를 잔인하게 다루기도 하고, 유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을 보면서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유다만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야 하며, 그것도 그렇게 심한 징계를 받아야 하나 생각됩니다. 아마 에스겔의 예언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5장 이하의 말씀들을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벌 주실 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과 유다백성들에게 내를 징계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를 향한 징계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계의 목적은 유다 백성들을 다시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 나라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에게 내릴 형벌은 그게 끝입니다. 그 징벌은 그 나라들을 완전히 망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라 멸망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어찌보면 작게 작게 자주 자주 징계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조금 크게 여겨지는 징계들은 그 정도로 안되니까 한 번 크게 손을 대시는 것이구요. 그렇지만 징계가 아무리 커도 징계는 징계입니다. 징계는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경우, 하나님께서 자주 자주 작게 작게 손을 대시지 않으십니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마지막에 크게 손을 대십니다. 아주 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악인의 운명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 없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그들의 양심에 맡겨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참으셨던 모든 진노를 그들에게 쏟아부으십니다. 징계가 아니라 형벌을 내리십니다. 


우리는 징계를 불편해 하면 안됩니다. 징계는 자녀만 받는 것이니까요. 자녀가 자기 아버지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내버려 두시다가 마지막에 아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면 그것처럼 철딱서니 없는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징계는 유쾌하고 행복하지 않지만, 그래도 징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고, 또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려는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신경 써 주시고 항상 돌봐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징계 받을 일조차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