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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4.01. 금요기도회 - 기꺼이 번명하나이다(사도행전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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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4장 10-21절





가이사랴 빌립보의 총독 벨릭스가 주제한 재판이 열렸고, 대제사장들이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의 고소가 끝났습니다. 상황은 바울에게 전혀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벨릭스는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바울보다는 유대인들의 편을 들어주어야 했고, 유대인들은 그런 그에게 그 자리에서 압력을 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벨릭스는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유대인들의 바램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명색이 총독인데 그저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은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이고,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로마의 정식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로마시민이라는 사실 자체는 바울 자신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자랑거리도 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의 로마시민권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고, 또 계속해서 바울을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정말 신비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실 수 있고,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참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정말 이런 것도 사용하시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정말 신묘막측하신 분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됩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변호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바울은 먼저 재판장으로서의 벨릭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았지만 그의 공적인 권위만큼은 확실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기쁘게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사용합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기꺼이 변명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여기 나오는 ‘기꺼이’라는 말은 원래 ‘거리낌 없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지만 거기에 더해서 ‘매우 평안하고 기쁘게’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놓여있는 상황은 전혀 ‘기꺼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꺼이’라고 말합니다. ‘기쁘고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이런 역설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 놀라운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바울은 “담대하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는 하나님의 소명과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덤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때까지는 그 중간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로 자신이 죽게 되거나 거기서 스톱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벨릭스에게 재판을 받는 일이 바울을 흔들리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분노와 억울함에 사로 잡히게 만들 수 없고, 그를 두려워하고 낙심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소명을 붙들고서, 아니 그 소명에 붙잡혀서 사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익입니다. 소명이 있고 또 소명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렸다가도 금새 회복됩니다. 다시 담대함을 얻고 기쁨을 되찾습니다. 소명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이루실 때가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삶이 그렇게 쉽게 흔들리고 우리의 평강이 그렇게 쉽게 깨지는 이유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로 우리가 정한 목적과 우리가 정한 방법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자꾸 흔들리고 평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을 정하고 그리로 가는 길을 정하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일을 하다가 보면요.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항상 한결같을 수가 없습니다. 중간 중간에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의 평강이 깨지고 용기를 잃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다가 보면 항상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의 종이냐? 너는 누구에게 부름받았느냐? 내가 너에게 요구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 원래의 부르심의 자리로 되돌아 가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하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이내 평강을 찾고 담대해 지기 시작합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거의 매번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회복시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으로써 만약 바울의 담대함과 기쁨이 부러우시다면 여러분 각자의 자리에서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소명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소명을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 가시길 원하셨는지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그 소명의 자리로 되돌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바울이 가졌던 담대함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불안함과 초조함, 그리고 기쁨 없는 마음은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명을 떠날 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소명의 자리로 분명하게 되돌아 간다면 평강과 기쁨도 회복될 것입니다.  


 이렇게 소명에 대한 확신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기쁨과 담대함의 첫번째 이유였다면 두번째 이유는 그가 그 동안 살아온 흠잡을 데 없는 삶에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요. 짧게 요약하면 로마법을 기준으로 해서 보든,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보든 자신은 이렇게 법정에 설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그것은 자신을 고소하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 자체가 100퍼센트 모함이고 무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 단 한 마디도 더 덧붙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고 자신들의 말이 다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의 자기 변호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재판은 여기서 끝나게 되고 오히려 다음에 보겠지만 벨릭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까지 얻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그저 좋지만은 않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당신의 제자들을 얼마나 거칠게 다룰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세상에 살면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되는 말씀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말씀이 바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유명한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그렇게 살고 행동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들을 마냥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괴롭히고 박해하려 들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그런 세상에서 세상에서 불필요한 갈등이나 핍박을 최대한 피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려면 그들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불리한 재판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면서도 지금껏 예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며 살았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면 그날 재판에서도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에 걸려도 걸릴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요. 


“뱀처럼 지혜로운 것과 비둘기 같이 순결한 것.” 얼핏 보면 이 두 가지는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처럼 보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도무지 서로 조화될 수 있을 것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순결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지혜로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순결하고 흠잡을 데 없는 선택이 되는지를 분별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 그는 마치 외줄을 타는 듯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굉장히 위험하고 긴급하고 그래서 상당히 잘못된 선택을 하기 쉬운 그런 상황들이 계속 이어졌으니까요. 그렇지만 바울은 그런 긴장된 상황 속에서 단 한 번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갈등이나 소란의 원인을 제공한 적도 없었고 율법을 기준으로 놓고 봐도 책 잡힐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로마 쪽에서 보나 유대인들 쪽에서 보나 아무런 책잡을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불리한 법정에 서서도 담대하고 기쁘게 자신을 완벽하게 변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감정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지혜롭게 ‘순결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떻게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장 위에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을 해야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순결하고 책 잡을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 어떤 때보다도 복음을 전하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에 있습니다.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종교를 갖는다고 하면 어떤 종교를 선택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설문조사에서 꼴찌를 차지한 것이 우리 개신교회였는데, 사람들은 그 이유를 교회의 부도덕하고 비상식적인 모습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정말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순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열매를 지금 우리가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문만 막힌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도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공격에 기꺼이 변호할 말이 없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입으로든 삶으로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복음에 어울리는 삶과 성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분별해야 하며 그 답에 따라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람들과 이 세상 앞에 항상 당당할 수 있고, 우리를 변호해야하는 기회를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기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기쁨과 당당함은 그저 성령충만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선천적으로 선하고 올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저 양심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자기 삶의 중심에 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복음에 맞추어 갈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지혜롭고 순결한 선택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특별한 복과 능력이었습니다. 


복음은 항상 복음에 합당한 삶을 요구합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그 복음은 비로소 우리의 능력이 되며 우리의 당당함이 되며 기쁨과 자존심이 되어 줄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지혜롭고 복음 때문에 순결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그것을 위해서 애쓰고 힘쓰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부르심에 따라 살아서 언제나 기쁘고 언제나 당당한 주님의 증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