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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4.08. 금요기도회 - 이태가 지난 후(사도행전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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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4장 22-27절




예루살렘 교회에 다른 지역의 형제교회들이 모은 구제헌금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던 바울은 거기서 붙잡힌 후에 이제 로마로 향해 가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소명이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바울과 함께 로마로 여행하면서 그 여행이 어떠했는지를 살펴 보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까지 가는 여행의 첫번 기착지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24장부터 27장까지 아주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 곳에 있으면서 왕이나 그 지역의 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성경이 그만큼 이 일을 중요한 일로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비록 피고인의 몸이지만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실패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복음은 전해지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들려지는 곳에서는 항상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시고 왕이라는 사실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얻는 사람도 있지마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들만 알아듣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라는 곳은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바쳐진 도시였고 거기 머무는 사람들도 모두 다 자기 왕국을 이루고 있는, 황제처럼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세상의 권력들, 특히 로마 황제처럼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섬기게 만들거나 그 뒤를 따라 자기도 똑같은 행세를 하고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 뒤에는 언제나 공중권세 잡은 자인 사탄이 서 있습니다. 사탄이 사람의 교만함을 부추겨서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처럼 되는 자리를 탐내게 하고 또 차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도시에서 그것도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그저 평범한 촌부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일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던지시는 선전포고이지요. 사탄이라는 놈이 이런 상황을 그저 보고만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는 언제나 다른 어떤 곳보다 싸움이 치열합니다. 그 동안 자기 수하에 있던 부하를 그냥 빼앗기고, 그동안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었던 땅을 순순히 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벨릭스가 됨됨이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바울의 잘못이 없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로마 시민인 바울을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처음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냈던 천부장 루시아가 가이사랴로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고는 바울을 보호해 주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실 벨릭스는 이미 복음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관심도 있었구요. 그래서 그 때부터 바울을 불러서 자기 아내인 유대인 드루실라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에 대해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는 도리’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도리’입니다. 예수님을 한 분 밖에 없는 나의 왕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원자로,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제사장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 분을 온 세상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든지 간에 이제는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 그것이 복음을 믿는 믿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항상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삶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댓가든 감수합니다. 이전에 그것 때문에 생명이 없는 삶을 그토록 오랫동안 살았고 그런 삶이 어떤 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 죄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죄입니다. 죄의 본질은 내가 나의 왕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에, 절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욕망과 본능에 따라 사는 삶의 방식을 고집해서는 절대로 의를 얻을 수도 없고, 그 의를 지켜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두 사람에게 절제에 대해서 말해 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일 자체가 아주 율법으로 보아도 그렇고 일반 상식으로 보아도 그렇고 너무나 부도덕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루실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왕의 손녀인데 원래는 열 여섯 살에 수리아의 작은 분봉국이었던 에메사의 아지스 왕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일년 만에 벨릭스의 꾐에 빠져서 유대의 율법을 무시하고 아지스 왕과 이혼한 후, 벨릭스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벨릭스와 드루실라가 이 죄를 그냥 묻어 두고는 복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그 사실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겠지만, 제 멋대로 양심을 어기고 율법을 어기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절제에 대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절제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심판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운명인 심판받는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본문을 살피면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는 예수로 말미암아 덧입어야만 하는 의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 의를 덧입고 또 계속 지키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삶을 다스리고 내려 놓아야만 한다는 절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결국 맞이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예수 믿는다고 하고 그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절제하지 않는 삶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그런 불편한 메세지를 모두 전했습니다. 그 불편한 메세지가 아니면 그것은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는 복음다운 복음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벨릭스가 복음을 듣고 두려워 했다고 기록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말씀을 두려워 하는 감정은 정말 바람직한 감정이니까요. 이제 이 두려움이 회개와 믿음으로 이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갑자기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이 말이 사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편함과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생겨나게 되는 감정에 바르게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는 기쁨과 위로, 그리고 사랑이 가득 차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 마음을 많이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죄책감이 생기게 하기도 하고 두려움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그 메세지를 외면하고 싶다는 감정이 생기게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런 마음에 지면 안됩니다. 그런 감정이 요구하는대로 따라 움직이면 안됩니다. 그 불편함과 죄책감, 그리고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우리 속에 꼭 처리해야할 숨겨진 죄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고, 그런 죄를 해결해야만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의 태도는 ‘정직함’입니다. 성도가 말씀 앞에서 정직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회복의 기회를 빼앗고 마음을 더욱 더 완고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전혀 의도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됩니다. 그 날 벨릭스에게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이후에도 바울을 불러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에게 복음에 대해서 말해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벨릭스에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벨릭스는 겉으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도 그 마음 속에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려움을 거부하자 그의 마음은 이런 상태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27절은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고 벨릭스는 그 동안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바울을 구류해 두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 기간이 무려 2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벨릭스는 두 해 동안이나 바울을 그것도 자주 만났습니다. 그 동안 바울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또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너무나 완고해져 버린 벨릭스의 마음에는 복음이 뚫고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때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쫓겨난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베수비오라는 큰 화산 근처에 있는 봄베이로 유배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그 화산이 터지는 바람에 그 곳에서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거 봐라, 회개하지 않더니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받아들이시면 안됩니다. 물론 두 사람의 죽음에는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더 중요하고 안타깝게 생각해 할 것은 그들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한 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무시했다가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영원히 단단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를 편하게 해 주는 것, 우리가 정말로 갖기를 원하는 것, 그렇지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기 위해서 떠나가고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 집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불편함 때문에 고개를 돌려서는 안됩니다.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시하거나 아니면 나는 절대로 안 그렇다는 듯이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고 자신을 합리화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한 발짝 더 하나님께로 다가가서 이전보다 더 진하고 풍성한 은혜를 얻을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될수록 우리 영혼은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서 그만큼 더 완고해져 가고 하나님을 아는 복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여러가지 감정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감정은  그 감정를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감정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바른 행동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든 긍정적인 감정이든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나는 그 감정이 나에게 어떤 행동과 반응을 요구하는지 그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불편하다고 피하고 외면하거나 그저 불쾌해 할 것이 아니라 왜 내가 그런 말씀 앞에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이유를 처리해야 합니다. 꼭 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통해서 더 복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져 갈 수 있고, 참 은혜의 열매를 거두어 들일 수 있습니다. 


나를 행복하고 기쁘게 해 주시는 말씀 뿐만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복되게 하시기 위해 나에게 뿌려주시는 선한 씨앗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모든 씨앗들을 달고 시원한 열매로 가꾸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