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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4.10. 주일오전 -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14)



20160410SM (#1).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2장 8-10절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게 사랑을 가르치소서
        당신의 마음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의 성령 내게 채우사
        주의 길 가게 하소서 주님
        당신 마음 주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제가 오늘 설교를 이 두 복음성가의 가사를 읽어드리는 일로부터 시작한 이유는 오늘 설교 준비를 위해서 말씀을 묵상할 때, 이 두 노래가 제 마음 속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으실 겁니다. 이 노래들을 부르거나 혹은 가사를 생각할 때,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분인지가 진하게 전해져 올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 분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모든 성도들이 드리는 가장 은혜롭고 진솔한 고백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들은 이 찬양들을 부를 때마다 그렇게 뜨겁고 간절한 마음이 되는 것이겠지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이 두 가지 고백을 잊지 않고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답게 일주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며 사셨습니까? 부활의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사셨습니까?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믿습니까? 이 두 가지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그 능력이 나타나고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를 닮은 곳이 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 특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그 무엇보다도 그 구원을 받는 우리들에게 큰 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구원을 설명할 때, 자꾸 사람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통해서 받는 복과 은혜가 워낙 많고 커서 그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빼먹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제가 부목사로 섬기던 때, 교회에서는 한 주가 멀다하고 결혼잔치가 있었습니다. 혼주가 되시는 성도님들이 그래도 교역자들이라고 그럴 때마다 피로연에 저희를 초대해주셨는데요. 저는 간혹 그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가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들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작 음식을 맛있게 먹고는 있지만 도대체 어느 집안의 누가 결혼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생각할 때도 자칫하면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실 자체는 기뻐하면서 그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빼먹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받고 구원받은 사람의 은혜도 우리가 누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혼자서 구원을 이루시고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앞서도 그랬지만 8절로 넘어오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구원이 샘물이라면 그 샘물이 흘러 나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죄 때문에 이미 죽어있던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구원하지 않으시고는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에서 흘러나온 샘물입니다. 다른 샘근원은 전혀 없습니다. “은혜로 인하여”라는 말 뒤에 붙어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 때문에,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저희 집 아이에게 아주 좋은, 아이가 제일 가지고 싶어하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아이는 그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선물을 건네자마자 손을 쭉 뻗어서 그 선물을 낚아 채듯이 가지고 갔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저희 집 아이는 그 선물을 받기 위해서 한 일이 있나요, 없나요? 없습니다. 손을 뻗지 않았느냐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손을 뻗은 것은 이미 주어진 선물을 받아들이는 행동이지 그것이 선물을 받은 원인이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 ‘손’을 일컬어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뻗은 손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모두들 잘 아실 겁니다. 그 믿음 조차도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실은 그 믿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20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요. 그 때 저는 정말 여러가지로 고민이 많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연애도 하고 싶고, 장가도 가고 싶은데 저를 좋아해 주는 여자애들은 없고… 그런 것들도 큰 고민이었지만 그 때 저에게 가장 큰 고민은 신앙적인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미워하시는가 보다.”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요.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부르짖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저를 가까이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 행복하고, 그 분을 생각하면 기쁘고 만족스러운 그런 감정이 도무지 생기질 않았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저를 일부러 멀리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저를 얼마나 절망스럽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주님이 우리를 가까이 이끌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으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믿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우리 속에 믿음을 넣어 주셔야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 믿음 앞으로 이끌어 주시고 믿게 해 주셨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 번씩이나 다짐합니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말입니다.  절대로 잊으면 안되고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 놀라운 구원을 얻은 것은 100퍼센트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 덕분인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분을 알지도 못했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원수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항상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만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듣기에 거북하실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예수를 믿기 전 우리의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구원받기 위해 ‘한 일’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 때 우리가 구원을 받을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라 아얘 마이너스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구원은 절대로 우리에게서 나온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100퍼센트, 아니 2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 여기까지는 그래도 신앙생활을 조금 해 오신 분들은 워낙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라 거의 무의식적으로라도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그 분 앞에서 무언가 공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으면 대개 그렇지 않다고 대답은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기도했더니 복 받았다”, “예수 잘 믿었더니 축복 받았다.”, “충성했더니 사업이 잘 되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아주 떨쳐 버릴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니까요. 그렇지만 여러분, 바로 이런 생각들이 우리가 예수 믿은 후에는 충분히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 앞에 공을 세울 수 있다는 대표적인 생각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기 이전에도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공을 세울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10절을 한 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다고 겉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지요. 배둘레햄도 그대로 있고요, 커다란 얼굴도 그대로 있습니다. 빠진 머리가 다시 나지도 않고, 그토록 저주했던 짧은 다리는 여전히 짧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때 우리는 속속들이 새로 지음을 받게 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진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이라는 틀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무슨 모양이었지요? 세상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라는 틀’ 속으로 옮겨 옵니다. 그러면 우리 모양이 어떻게 바뀔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모양’으로 바뀝니다. 우리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담긴 틀 때문입니다. 틀이 바뀌니까 우리들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틀이 바뀌게 될 때, 단순히 모양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들어 있던 것들도 다 새로운 것으로 바뀝니다. 비유하자면 진흙이 아니라 금으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하시죠? 그 모든 일을 누가 하시죠? 진흙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다가 보면 그래도 내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없던 착한 마음도 생겨나고, 남을 참아주고 배려하는 모습도 보이게 되고, 또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는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기특한 마음도 품게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기적같은 행동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변화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런 기특한 행동들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일까요?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으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신 것이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무언가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일을 위해서 다시 지음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둘째, 우리가 그런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런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이이라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무슨 뜻이지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고 선한 생각을 주셨으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고, 그 선한 일 조차도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만두를 빚었습니다. 아주 예쁘게 그리고 맛있게 빚었습니다. 먹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만두의 모양과 그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을 결정하고 그 내용물을 넣은 것은 만두 자신입니까?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모양을 냈고, 어떤 내용물이 얼마만큼 들어갈지를 다 결정했고 그 다음에 그것을 요리했습니다. 그 만두의 모양도 제가 낸 것이고, 그 맛은 제가 그 만두 안에 넣은 것들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만두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 다 이렇습니다. 만드는 재료와 내용물을 결정하는 것은 만드는 사람이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엇에다 쓸지, 무슨 모양이 될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도 만드는 사람이지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 만드셨습니다. 새로 만드실 때, 그 안에 들어가는 모든 것도 다 새롭게 바꾸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지요?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그런 우리가 어느 날 선한 일을 했습니다. 아주 기특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나온 것입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이 전부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 좋은 재료를 넣어, 그런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들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 선한 일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구원에 관한한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 믿은 이후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 어떤 선한 일도 행한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 안에 선한 것들을 넣어 다시 빚어주셨기 때문에 그래도 이나마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한 가지입니다. 성도는 그저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100퍼센트 은혜로 살아난 사람들이 성도들이고, 100퍼센트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기 전이나 구원 받은 이후에나 우리가 자랑하고 내세울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이고, 자기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래서, 너는 너의 구원이나 선행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성경의 주장, 그 모든 것들은 전부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교회 바깥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은 할 수 없다, 인간은 무가치하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미를 찌푸립니다. 왜 그렇게 사람에 대한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야기,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 주셔야만 하고 또 모든 것을 해 주신다는 것은 전혀 불쾌하고 기분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보면요. 사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상생활을 할 때 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를 위해서 섬길 때에도 우리 마음 한 켠에는 꿈틀대는 욕심이 있고,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친절을 베풀면서도 알아줄 것을 기대하고, 은밀히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사랑을 할 때도 되돌아 올 것을 먼저 생각하지요.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백색을 상상할 때도 거기에는 항상 검은 점이 찍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것들, 여전히 악한 것들이 섞여 있는 것들을 받아 주십니다. 기뻐해 주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러실까요? 완전한 것만 기뻐하시는 하나님, 완전히 선한 것들만 인정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흠많고 점많은 우리의 ‘선한 일’들을 받아주시고 칭찬해 주실까요? 그것은 비록 그것이 완전하지는 못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 만드실 때 우리 속에 그런 마음과 의지, 그리고 생각들을 넣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한 일들은 거기서 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선한 것이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면, 우리가 행하는 최고로 선한 일들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퇴짜만 맞을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우리의 힘으로 구원에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있어야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덧붙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봤자 언제나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흠결투성이인 것일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은혜로 되게 하셨을까요? 왜 우리의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들까지도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게 하셨고, 그래서 구원에 대해서도, 선행에 대해서도 전혀 자랑하지 못하게 막아놓으신 것일까요? 이제 아시겠지요? 무엇이든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이든지, 우리의 신앙생활이든지, 또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이든지 거기에 자랑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은혜는 죽어 버립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 불완전한 우리는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칭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 어떤 일을 가지고도 자랑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혼자서 다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순전히 은혜로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나된 것,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지으신 분도, 나를 부르신 분도,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순백을 생각할 때도 회색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항상 은혜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시고 더욱 더 은혜에만 의지해서 사십시오. 자랑하려 하지 마시고, 자랑거리를 만들지 마십시오. 자랑이 끼어드는 순간 은혜는 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은혜 없이 사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가장 행복하고 은혜로운 성도일까요? 가장 행복하고 은혜로운 성도는 나의 나됨을 알고, 은혜의 은혜됨을 알며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성도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성도일까요? 내 속에 선한 것 하나 없지만 내가 행하는 부족한 일들까지도 선하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는 성도입니다. 꼭 이런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랑이 없이도 내세우지 않아도 언제나 행복하고 언제나 기쁨 넘치는 성도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