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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4.17. 주일오전 예배 -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에베소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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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에베소서 2장 11-22절




1989년 11월 9일에는 역사적으로 아주 뜻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 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린 일이었습니다. 이 장벽은 1961년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그 밖의 동독지역들과 분리시키기 위해서, 그 당시 동독을 지배하고 있던 소련이 만든 것인데요. 그 이후 이 장벽은 동독과 서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 장벽이 세워진지 근 30년 만에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면서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 때의 감격적인 장면을 텔레비젼을 통해서 지켜 보셨을텐데요. 사람들이 커다란 헴머를 들고 와서 그 장벽을 직접 허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벽의 조각들을 기념으로 가지고 가서 집에 진열해 놓기도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일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 후로 많은 나라가 독립을 하기도 하고, 또 분단된 나라를 다시 합치기도 하면서 결국 지구상에서 분단된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나라는 언제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고 회복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벽을 만듭니다. 그래서 집과 집 사이에도 담이 있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벽이 있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 형제지간이나 부부사이에도 벽은 있습니다. 보이는 벽, 크고 두껍고 높은 벽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벽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벽들 때문에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며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면서도 좀처럼 그 벽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할 수만 있으면 그 벽을 더 두텁게 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만든 그 어떤 벽보다도 더 두껍고 높아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허물어뜨리거나 넘을 수 없는 엄청난 벽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벽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벽이었습니다. 성막도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살펴보면, 성전은 여러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외벽은 성전과 성전 바깥을 나누었고, 들어오면 거기는 성전 바깥 뜰이 나옵니다. 이곳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들은 여기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 다음에는 여인의 뜰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해도 여인들은 여기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남자의 뜰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 남자만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의 뜰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성소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성소 안쪽에 있는 지성소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커튼이 하나 쳐져 있습니다. 이 커튼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조금 두껍게 짠 카페트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단 한 차례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 선택된 제사장만이, 그것도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기준을 모두 만족시킨 경우에만 그리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함부로 그 벽을 넘었다가는 원칙상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이 그리로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해를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막은 어찌보면 사람이 넘지 않으면 안되지만 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그런 장벽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장벽이 허물어 졌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었던 그 장막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 지성소는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던 죽음을 댓가로 지불하지 않고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무너져 내렸고 그래서 누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분을 만나 뵙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놀라운 일은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찟어 생명을 내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내놓지 않아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용서된 은혜의 자리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원하고 또 원해도 허물 수 없었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진 놀라운 은혜의 자리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유대인들도 사랑하셨고, 또 이방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실 수 밖에 없고 적대감을 품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유대인이건 누구이건 이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직 넘지 못할 장벽이 허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장벽 너머에 있는 원수같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얘 이 장벽을 허물어 버리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그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우리를 완전히 받아주시고 사랑하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 장벽이 무너졌기 때문에 또 하나의 장벽이 함께 무너졌습니다. 13절과 14절을 찾아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찢어 죽음에 내어주셨을 때, 또 어떤 담이 함께 허물어 졌다고 말합니까? ‘너희’와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이방인’과 ‘유대인’입니다. 성경은 이 둘 사이에 있었던 장벽이 그 때 함께 무너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기 전까지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도 이 장벽과 비슷한 장벽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높고 큰 장벽은 바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장벽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거의 개와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할례도 없었고 율법도 없었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은 그런 이방인, 정확하게는 로마사람들의 압제 아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힘도 없는 주제에, 그래서 자기 나라도 지켜내지 못한 주제에 이상한 자존심만 높아가지고 대 로마제국의 시민을 무시하다니 그들 보기에 유대인들은 그야 말로 우습지도 않고 기분 나쁜 존재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에게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미움과 적대감은 절대로 넘을 수도 없고, 또 넘어가려고 하지도 않는 그런 장벽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바로 이 장벽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높고 큰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 놓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길을 통해 하나님 앞에 와 보니 내 옆에는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던 로마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이 미움의 장벽 만큼은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겠다고, 또 저 멸시의 장벽만큼은 넘어갈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아들의 육체를 찢어 그 장벽을 허물어 주셨는데, 내가 그 은혜 덕분에 지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리에 와 있는데, 나와 똑같은 은혜의 길을 걸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온 다른 사람들을 여전히 원수처럼 여기고 미워하고 무시하는 일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벽이 허물어 질 때,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벽은 저절로 함께 허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15절과 16절로 넘어가서 그 구절들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께서 왜 아들의 육체를 찢어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장벽을 허물어 주셨지요? 화평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둘로, 셋으로, 그리고 여럿으로 벽과 벽을 세우고, 적개심과 미움으로 이리 저리 나뉘어져 있는 사람들을 십자가의 은혜 아래에서 한 사람처럼 만드시고, 그렇게 ‘한 사람’처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을 받아들여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여럿으로 찢어져 있는 사람들과는 화목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나뉘어짐 자체가 또 하나의 죄였고, 죄의 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먼저 우리를 하나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서로 서로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질 때,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벽도 함께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반란사건 때, 폭도에 손에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나중에 반란이 진압되고 아들을 죽인 당사자가 잡혔습니다. 그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이제 죽을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이 사람을 매일 찾아가서 손에 성경책을 쥐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계속해서 당국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사정하고 또 사정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내 아들로 삼을테니까 죽이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너무 간절하게 부탁하고 또 부탁하니까 결국 당국은 그 청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사람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정말로 그 사람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양자로 삼아 곁에 두고 함께 살았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은 예수를 믿고 신학교에 입학해서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문득 ‘화목’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다가 이 분의 일화가 생각 났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또 사랑하는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셨는지를 알고 그에 반응할 줄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손양원 목사님의 행동은 단순히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베풀어 주신 화목케 하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떤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내가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 모두에게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으니 우리들도 그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20절과 21절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아마 여러분도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들려준 모든 이야기가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너희’, ‘우리’, ‘하나’, ‘화목’이런 말이 굉장히 많이 나왔으니까요. 이제 바울은 20절로 넘어가면서 결론적으로 과연 교회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계속해서 나오고 또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희 중에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금요일 새벽으로 드디어 에스겔서를 끝냈는데요. 저는 에스겔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48장 36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습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성경 밑의 각주를 보니 그 뜻이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마른 뼈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살리십니까? 왜 무너진 성전을 더 완벽하게 다시 지으십니까? 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읍을 완전히 다시 세우시지요? 그 모든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그 곳에 함께 거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원이 얼마나 크고 강하셨으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얘 ‘여호와 샴마’로 바꿔 부르시고는 내가 이제 다시는 그 성읍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수많은 말들이 있고,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다 일리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적이기만 하다면 말이죠.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훌륭하게 갖추어지고, 또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고 있다고 해도 그것 하나가 빠지면 교회가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안 계시는 교회도 있나?’ 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런 교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고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 중에는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교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어디 묶이시는 법이 없지요. 그래서 언제든지 교회를 떠나실 수도 있고 또 교회로 돌아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붙들어 둘 수 있을지를 알아야 하고 또 거기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본 이야기들은 전부 교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됨에 대한 이야기, 화목과 화평에 대한 이야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의 결론인 성전에 대한 말씀도 우리가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가 되고 하나님이 계속 머물러 계시는 곳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성도의 화목,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나오는 성전에 대한 말씀 속에는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는 귀중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성전이 거룩한 곳이라고 해서 성전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는 성전의 벽도 있고, 제사장들의 방도 있고, 제물과 여러가지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도 있고, 제사장들이 쉬는 방들도 있습니다. 제물을 삶는 부엌도 있고 여기서 저리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도 있고, 성전 바깥 뜰과 안뜰도 있습니다. 사실 성전에 속한 이 모든 부분 부분은 모두가 다 똑같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다 똑같이 중요하거나 똑같이 귀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부분들 중에서 하나라도 없으면 그것은 온전한 성전이 될 수 없고, 또 그렇게 온전한 성전이 아니면 하나님은 거기 계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매일 그 모양인 사람들도 있구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지만 영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안고 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난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아주 징그럽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놀랍게도 그 모든 사람들이 지금 함께 한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요. 이것은 그런 사람이 빠지면 우리는 성전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저 사람만 없으면 하는 바로 그 사람 덕분에 실은 교회가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가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믿습니까? 


제가 말씀을 준비하다가 아마 내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성도들이 거의 아멘을 하지 않을 것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요? 선뜻 아멘이 나오질 않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바로 교회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문제가 있고 아무리 저마다 서로 마음에 안드는 구석들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다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자꾸 이 사실을 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대할 때, 자꾸 인간적으로만 대합니다.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부둥켜 안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닌 사람은 계속 아니고, 미운 사람은 밉고, 괄호 밖에 내놓은 사람은 좀처럼 괄호 안으로 넣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쌓은 벽을 허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채로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거처로 지어져 가는 일에 있어서 심각한 방해를 받고 있고, 하나님이 그 안에 함께 계시는 엄청난 복을 놓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계속해서 어떤 지체를 용납할 수 없고 품기가 힘드시다면, 우리의 모퉁이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퉁이돌이었습니다. 모퉁이돌은 거기서부터 또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건물이 세워지게 되는 그런 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님은 원래부터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그런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들어 성전의 모퉁이 돌, 가장 중요하고 귀한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른가요?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라고 원래부터 성전의 재료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는 전혀 성전의 재료가 될 자격이 전혀 없던,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그런 돌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었고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 그런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을 재료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고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집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이 있나요? 우리가 갖춘 자격이 있나요? 아닙니다.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떤 지체를 그리 못 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들의 본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예수님과 연결시켜 주셨고 지금도 성령님 안에서 성전의 일부로 지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안에 있을지도 모를, 우리의 하나됨을 가로 막는 모든 생각과 마음들을 처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방법은 우리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는 크고 작은 장벽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계속해서 허물어 가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할 때, 어떤 이유로건 미움이나 정죄, 사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생기거든 그것을 나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마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복된 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모퉁이돌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지금 하나님의 집으로 영광스럽게 지어져 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싸우십시오. 내가 그 은혜를 제대로 더 깊이 깨닫게 해 달라고, 그 화목의 은혜로 그 사람을 품고 기다려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런 마음과 싸우십시오. 우리가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기게 해 주실 것이고, 비록 완전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나로 지어져 가는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항상 ‘여호와 샴마!’의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우리 광현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 마음의 장벽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 헐어 버리겠습니다. 헐고 하나가 되겠습니다. 
  2. 우리 교회가 여호와 샴마의 하나님과 항상 함께 거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