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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4.21.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다니엘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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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4월 21일 목요일




다니엘서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시고 또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정말 독특합니다. 평화로울 때,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시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거의 멸망직전에 있을 때, 그 유다를 망하게 만든 바벨론 땅에서, 유다사람들도 아닌 바벨론의 왕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신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속에서도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느부갓네살의 꿈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 꿈과 달리 느부갓네살이 사람들에게 자기 꿈을 알려주고 그 꿈을 풀어 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 꿈을 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꿈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꾸게 하신 꿈이고 동시에 다니엘이 아니면 풀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다니엘이 왕 앞으로 불려왔고 왕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니엘은 왕 앞에서 그 꿈을 풀어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왕이 꾼 꿈은 왕 자신의 미래에 대한 좋지 않은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왕 앞에서 그 왕이 앞으로 7년동안 미쳐서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짐승처럼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왕이 그런 운명에 처해지는 것이 단지 온 세상을 다스시리고 그 세상을 대신 통치할 사람들을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더 난감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바벨론의 관리로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꿈을 해석해 주기는 했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왕은 7년 동안의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을 한 후에 전혀 하나님에 대해서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그리고 왕이 깨닫지 못한다면 왕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을테니까요. 


모든 상황은 다니엘의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고 1년이 지나서 느부갓네살이 왕궁 옥상을 거닐며 자기 왕국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자화자찬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은 이 모든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십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개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단 한 마디 말씀으로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듣고난 다음에 그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되어서 들짐승들처럼 풀을 먹으며 7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는 딱 7년이 지나자 다시 제 정신이 돌아와서 왕권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지금 느부겟네살이 직접 자기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크게 감동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아니 어찌 그런 경험까지 하고서도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저 하나님을 인식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여 놀라기는 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신앙에 대한 경고를 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런 놀라움이나 감정 자체가 신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신앙을 이런 감정적인 경험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반드시 감정의 움직임이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무덤덤하기만한 감정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래도 감정은 신앙이 아닙니다. 흥분된 감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 자체도 신앙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충성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리고 하나님께 변함 없이 신실한 충성을 드릴 때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신앙의 중심을 한 번 들여다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믿음을 주실 것도 아니면서 그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했던 것일까요? 하나님의 목적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은 바벨론 사람들에게 패망한 나라의 포로들이 섬기는 별 볼 일 없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신을 섬기는 나라의 힘이 곧 그 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를 향해 진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누구인지를 드러내 보여주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유다백성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이 오해받게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또 한 가지 그 일은 유다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그리고 그 어간에 바벨론에서 벌어진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서 낙심해 있는 유다백성들에게 비록 내가 지금은 너희를 버린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너희가 섬기는 나 하나님은 여전히 온 천하의 왕이고 주인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알고 또 믿어야 할 때는 내가 잘 나갈 때, 내가 평안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낙심해 있을 때,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그리고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같이 여겨질 때입니다. 그럴 때는 우리의 신앙이 많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때, 마치 자신을 신처럼 생각하고 있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의 귀에 ‘너희가 믿는 나는 바로 이런 하나님이다!’라고 아주 큰 소리로 외치셨던 것입니다. 


사실 꼭 이런 방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마치 바벨론에 있는 유다 백성들의 삶처럼 느껴질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정말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신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어떻게 사랑하며 인도하고 계신지 세밀하고 확실하게 경험하고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상황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더 명확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꾸며놓으신 무대인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상황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꼭 찾으시기 바랍니다.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는 우리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확신있고 든든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