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4.22. 금요기도회 - 아그립바와 버니게가(사도행전 149)



20160422FE (#1).mp3.zip






본문 : 사도행전 25장 13-27절




바울은 로마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벨릭스 때문에 2년이 넘는 세월을 가이사랴에 붙잡혀 있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거기 붙들려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그곳을 떠나 로마로 가게 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황제에서 자기 일을 상소하기는 했지만 보내주어야 가는 것이지 마음대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한 일로 바울에 대한 재판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래도 베스도는 바울을 그냥 보내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자신의 책임을 떠 넘길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인물이 인사차 자신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로 그 당시 유대의 북쪽을 다스리고 있었던 아그립바 왕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도착하자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귀찮은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바울을 로마로 보내면 그게 자기가 한 일이 되지만, 아그립바가 심문하게 한 후에 그의 의견을 첨부해서 보내면 그것은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그렇게 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의 융숭한 대접을 마치고 난 다음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넌지시 바울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는 일단 자신을 아주 공정한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그런 자신이 볼 때, 바울은 도무지 죽일 죄를 지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 줄을 몰라서…” 겸손한 말 같지만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죄가 없으면 석방해야지 무슨 심리를 더 합니까? 사실 이 말은 아그립바 들으라고 한 소리였습니다. 내가 심리를 잘 못하니 당신이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요. 뒤에 26절과 27절에서도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지만 나는 심리를 잘 할 줄 몰라서 로마로 올려 보낼 때 고소장에 적을 내용을 찾을 수가 없으니 유능하신 아그립바께서 현명하게 심리하셔서 고소장에 적을 꺼리를 찾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말은 맞습니다. 로마군사들의 호위를 붙여서 바울을 로마황제에게까지 올려 보내는데 고소장에 적은 내용 하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것은 책임을 떠 넘기려는 허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그립바는 그 사실도 모르고 그 미끼를 덥썩 물었습니다. 자신을 높여주는 베스도의 달콤한 입술에 속아서 말이지요. 아그립바는 자신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을 테니 재판을 열어달라고 요청했고, 베스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날 바로 재판을 열었습니다. 


다음 날 재판장에는 아그립바가 버니게와 함께 있는 위엄, 없는 위엄을 한껏 떨치며 입장했고 그 자리에는 그 지역의 모든 권력자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피고가 되어 입장한 후, 베스도의 재판을 시작한다는 발언과 함께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참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마로 가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다 잡아먹고 있었고, 또 쓸데 없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만 계속해야 했으니까요. 또 똑같은 재판을 몇 번이나 받아야 하는지 그것도 참 지루하고 답답한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그림을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면 이 그림이 굉장히 달라집니다. 물론 시간은 지체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매도 전혀 없는 일들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치한 권력자들의 권력게임에 바울은 이리 저리 휩쓸리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고, 또 그들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지금 바울이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2년 전에 유대 땅을 떠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바울은 절대로 이런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 총독인 벨릭스와 그 아내 드루실라, 신임총독 베스도, 그리고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그리고 그 지역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전혀 복음이 전해질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계속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지체 높은 사람들이 오히려 바울을 찾아오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쨋든 그저 자기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가이사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부터 계속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면서 이 일이 얼마나 신기하고 신났을까요? 마치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세상은 이름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그런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게 숨어서 이 세상을 움직여 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분이신지를 알고 또 확신한다면 우리는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사람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 모습 말이지요. 만약 바울이 로마에 가는 일에만 붙들려서 그것만 생각했다면 가이사랴에서의 바울은 굉장히 조급하고 답답해 했을 것이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통해 은밀하게 그렇지만 너무나도 분명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알고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세워진 하나님의 무대 위에서 주인공은 바울을 재판하는 총독이나 왕, 그 지역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죄인으로 서 있었던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이사랴는 하나님께서 유대의 권력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택하신 유대 땅 안의 로마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 가이사랴에서의 바울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다루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복음이 들려지는 일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가이사랴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왕이고 싶어하는 사람들,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래서 로마의 황제를 동경하는 사람들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소식입니다. 너 자신이 아니고, 로마의 황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너의, 그리고 이 세상의 진짜 왕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자기 맘대로 점령해서 자기 땅처럼 다스리던 세상 나라를 향해 전면전을 감행하신 것입니다.  


그 날 바울은 기라성같은 사람들 앞에 서 있었지만 결코 기죽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정작 서로 눈치를 본 것은 거기 모여 있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눈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안 그런 척 해도 아그립바의 눈치를 보았을 테구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다 거기 좋아서 왔겠습니까? 서로 눈치보고 또 윗 사람 눈치보느라고 온 사람이 태반이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진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왕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서 왕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무대 위에서 맡겨진 역할만 최선을 다하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가이사랴에서 열린 재판장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그 날 재판장에 불려 나온 바울처럼 세상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우리의 주인 노릇하고 왕 노릇하려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 삶의 가치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려는 수많은 가치와 사고방식들, 그리고 우리들을 눈치보며 살게 하려는 세상의 커다란 힘 앞에 우리는 항상 서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칫하면 우리는 눈치를 볼 수 있습니다. 움츠러 들 수 있고 겁을 집어 먹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짜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왕은 세상이나 사람들 중의 어떤 힘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삶을 맞춰가야 하는 기준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 앞에 서 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왕 노릇하려는 세상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향해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또 증거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갑갑한 상황 속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 누구도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자리에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왕은 억울하게 붙들려 있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온 세상을 움직여 가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사람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의 로마가 바울에게로 오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못났어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별 것 없어도 그 분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왕 노릇 하려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고 외치며 그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부름받은 영광스러운 사람들 입니다. 


언제나 내가 참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이 나에게 맡기신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수많은 증인들 앞에 섰듯이 나도 그렇게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내 삶과 신앙의 증인들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이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되도록 애쓰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복음을 드러내면서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자리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선포하며 살아서 마지막 날 우리의 왕되신 그리스도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