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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5.15. 주일오전 - 무릎을 꿇고 비노니 3(에베소서 19)


20160515SM (#1).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3장 14-21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난미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제가 문득 성경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말씀들이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해져서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일부분인데도 참 많지요? 그런데 이것은 제가 찾은 것들 중에서 100분의 일도 안됩니다. 성경이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독교라는 말을 들으면 ‘사랑’이라는 말을 먼저 생각하며,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사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사실 ‘사랑’이라는 이 아름답고 행복한 말을 가장 버거워하고 있고,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사랑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우리들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비난들이 오해나 무지에서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요. 제가 예전에 ‘칭찬합시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칭찬 릴레이가 계속 이어지는데 가만히 보니까 거기 나오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개신교도들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래도 성도들이 사랑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많이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가까운데 있는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먼 곳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일까지 우리의 사랑하는 일이 여전히 미약하고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해서 사랑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아니라고 말하기가 힘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도 발견하셨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독특한 점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이 좋은 것이라고 설명하거나 사랑하라고 권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하라’고 ‘사랑해야만 한다’고 사랑을 명령합니다. 그것도 최고로, 그리고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이지요. 이 세상의 어떤 법이나 도덕도 사랑을 이렇게 까지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힘들어 하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아이들 중에서 선천적으로 공부를 좋아하고 또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는 아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들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고 또 공부를 잘 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또 공부를 그리 잘하지도 못했던 자기 속에서 나온 아이이니 모를 리가 없지요. 그리고, 사실 부모라고 해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 공부를 잘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아이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기 싫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그런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인가요? 공부하지 않는 일이 악하고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기 싫어도, 또 잘 하지 못 해도 공부하는 일 자체가 주는 많은 유익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금 하기 싫다고 하지 않고 잘 하지 않는다고 그만 두었을 때, 잃게 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부해라, 공부해라 그렇게 자녀를 닥달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은 공부와는 다릅니다. 공부하는 일과는 달리 사랑하는 일은 그 자체로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벌을 주고 비난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사랑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의 윤리적인 당위성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시면서 꼭 사랑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데에는 더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가 잃어버리고 누리지 못하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 자녀에게 ‘너 그래도 공부해야 돼!’라고 이야기하는 부모의 심정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도 들어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 중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두번째 기도인데요. 사실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지막 세번째 기도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 지는 것, 속사람도 그 사람의 실제 생활도 하나님처럼 충만해 지는 것. 그것이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이 자신과 함께 누리기를 바라는 최고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을 얻으려면 밟아야 할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성도의 속 사람이 강건해 지는 일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고 깨닫는 일을 통과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속 사람이 충만해 지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번째 기도 제목은 바울의 기도 속에서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해야만 우리의 믿음도 강건해 질 수 있고, 그렇게 강건해 진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그만큼 확실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신앙과 삶이 세워지는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만이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하시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깊고 넓고 높고 오래 참으시는 변치 않는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이해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잠시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요. 사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녀가 그 사랑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계속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정말 다양한 그릇에 담아서 자녀에게 부어줍니다. ‘이게 내 사랑이야, 요것도 내 사랑이야, 모양은 다르지만 이것도 마찬가지야’ 하고 그 사랑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런데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이상하지요?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자신에게 해 주는 어떤 ‘일’이이나 선물을 통해서 확인하는 일 자체가 그 사랑을 제대로 깨닫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도 강해지고 풍성해 집니다. 왜 부모가 되어서야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부모가 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 부모님이 우리 가슴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까지 부모님들은 우리 바깥에 계셨습니다. 바깥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을 통해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느꼈던 것이구요. 그런데, 우리가 부모가 되어 자녀를 사랑하는 순간 부모님들은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 때 우리의 가슴은 우리 부모님들의 가슴과 같은 가슴이 되고 그래서 그제서야 그동안 받아왔던 사랑의 크기를 제대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계속 머물러 계시면서 직접 부어주시는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니 좋은 것 주실 때는 사랑하신다,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다가도 다음 날 부족한 것 하나 생기고 어려운 일 하나 생기면 주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나를 아끼지 않으신다고 투덜거리고 흔들리는 것이겠지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항상 우리 안에 확실히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하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의 참 모습이 어떤 지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18절과 19절을 함께 읽을 텐데요. 제가 앞 부분을 읽을테니까 여러분은 그 다음 부분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능히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 다음이 어떻게 되어 있지요? 같이 읽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 여러분, 왜 사람들은 항상 비어있지요? 왜 욕심을 부려도 공허하고 애써 취해도 만족이 없지요? 손에 무엇을 쥐고 있어도 불안하고, 그것을 쫓아갈 때는 왜 또 그렇게 조급하지요? 왜 부자일수록 더 돈에 집착하고 건강한데도 여전히 건강에 붙들려 살지요? 심지어는 왜 부족함이 없는데도 여전히 삶은 매말라 있지요? 그것은 사람들의 영혼 한 가운데 뚫려 있는 구멍 때문입니다. 그 구멍이 메꿔지지 않아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멍을 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앞에서 잠시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의 가슴이 부모의 가슴이 되어야 비로서 우리는 부모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굉장히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때부터 이상하게도 우리 삶은 갑자기 든든해 지고 풍성해 집니다. 가난하기만 했던 마음이 풍성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요람 안에서 잠든 아기처럼 평안해 집니다. 물론 그게 그렇게 오래가지 않아서 문제이지만, 단지 그 사랑을 받고 있었고 또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그런 놀라운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요,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그 크고 깊고 높고 진한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면, 그리고 내가 항상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요? 그러면 분명히 우리 안에 있는 그 구멍이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문득 깨달은 부모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의 작은 구멍들을 채워주었듯이 예수님의 사랑은 그 구멍을 온전히 매꿔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영혼은 다른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은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만 참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지를 제대로 깨달아 알고, 내가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 때부터 우리 안에 있는 구멍은 메꿔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짜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충만한 삶은 하나님 나라에 가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도 누릴 수 있게 이미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그 안에서 살게 되면 지금 여기서도 이런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로 주고 싶어하시는 보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 보물을 찾기 위해서 지나가야만 하는 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보물이 담긴 상자를 여는 열쇠에 대한 이야기만 더 들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 보물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정리해 볼까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주고 싶어하시는 보물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전해주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보물들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십니다. 꼭 우리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여러분을 충만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보물 상자를 여는 열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지요. 열쇠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선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넉넉하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깊어지고 분명해지는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이제 그 열쇠가 무엇인지 드러나지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구체적으로 누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성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성도들 사이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 가운데서 터가 굳어지면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넉넉하게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누면서 뿌리가 깊어지고 터가 닦이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국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나누는 사랑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직접 부어주시는 사랑과 더불어서 성도들이 나누는 사랑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알게 해 주고 누리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그만큼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고 그만큼 비어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이유,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신 아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예수님의 사랑의 풍성함과 완전함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 가운데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고, 그 사랑으로 자신이 충만해 지는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영혼의 빈 부분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고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내어 주셨고,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실제로 보여주시고 증명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때, ‘아! 그렇구나.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구나!’하지만 사실 원수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시는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정말 커다란 상처를 입히고 손해를 끼칩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분노가 치미는 그런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잘 됩니까? 잘 안됩니다. 사랑은 커녕 용서하기도 힘듭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용서하는데 실패하고 사랑하는데 좌절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이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인 나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 보려고 아픈 노력을 기울여 보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그 부분이 계속해서 비어있는 상태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 기를 쓰는 사람이 사랑에 힘겨워하고 실패하면서도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점점 더 풍성해져 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교회 안의 사랑이라고 해서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고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용서는 힘들고 사랑하기는 더더욱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래서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상자 열쇠를 다시 반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서로 용서하는 용서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려 주시고,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우리의 빈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사랑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도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에 헌신해야 합니다. 용서하기 힘들어도, 사랑하기 힘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어도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결국 사랑하게 하실 것이고, 그 열쇠로 굳게 잠긴 보물상자를 열어 우리를 만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보물을 얻는 기쁨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기도를 따라 저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함께 묵상하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1. 다시 한 번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아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1. 그 풍성함을 위해서 사랑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우선 한 몸 이룬 성도들을 조금 더 넗은 마음, 조금 더 큰 사랑으로 대하겠습니다. 용서하고 용납하겠습니다.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