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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5.22. 주일오전 -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에베소서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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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1-6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말이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말이 떠오르고,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죄 용서의 은혜’와 ‘영혼구원’,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 등을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해결되고 용서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 들려주는 복된 이야기이고 또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구원’이라는 그림의 전체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그 그림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려고 계획하신 더 큰 그림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만물의 구속’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것 때문에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는 그 보다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죄 때문에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하나였던 것들이 전부 다 깨지고 갈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 또 사람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 까지도 심각하게 깨뜨려 놓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계획은 이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 그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그 세상 속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어 가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이 세상에 죄를 끌어들여서 하나님의 계획은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모든 관계는 깨어지고 모든 만물은 죄가 만들어 내는 죽음을 닮은 질병을 앓으면서 신음하며 고통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세우셨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고, 이 세상의 만물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한 처음보다 더 완벽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 계획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온 세상을 완전히 하나가된 하나님 나라로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은혜로운 사실은 이 계획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원래 맡았던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놓고 자신과 세상 만물을 고통과 죽음 가운데로 몰아 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죄를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온 세상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흔히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그 나무의 위치와 전체 숲에서 가지는 의미와 목적, 그리고 역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이라는 나무 한 그루만 보고, 그것에만 집착하면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 나라라는 큰 숲의 그림 안에서, 그 그림을 통해서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지 알게 되고, 구원을 얻은 사람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진짜로 가치있고 귀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구원얻은 다음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 자체에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구원을 큰 그림 안에서, 원래의 그림 안에서 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큰 그림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끝이 아니라 훨씬 더 영광스럽고 귀한 삶으로의 또다른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부르심이란 바로 만물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이 세상에 예수님의 생명과 은혜를 전달하는 일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하는 하나 하나의 일들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그 부르심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여기까지 오시면서 에베소서가 참 쉽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구원에 대한 작은 그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아주 크고 영광스러운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큰 그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익숙하지 않고, 그래서 실제 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라는 작은 그림은 ‘만물의 구속’이라는 더 큰 그림의 일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시 하나로 통일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계획 중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고,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2장에서 보았듯이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의 머리되신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을 다시 하나되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그 부르심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여기까지가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는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교회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렇게 엄청난 은혜와 특권을 주셨다고 말해 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진짜 계획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만물과 온 세상을 다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교회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조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성경대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해 놓으신 것을 잘 지켜내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하나됨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에 맡겨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약 머리가 하나인데 몸이 여러 개라면 그 몸이 어떻게 머리와 자기 발 밑의 세상을 하나로 연결시켜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꾸 우리 스스로 교회를 하나로 만들려고 합니다. 물론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력의 방향이 틀렸습니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성령 안에서 이미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하나로 만들어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하나됨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가야 할 우리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려고 하고, 하나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물을 손에 들고서 그 선물이 자기 것으로 믿어질 때까지 그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하나로 만드셨다고 하셨으니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과 상관 없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하나’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는 하나로 출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도 한 분 이시죠? 또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인 머리와 하나의 영을 가지고 있는 몸이 여럿일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그런 괴물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머리도 하나, 영혼도 하나, 그리고 몸도 하나인 온전한 ‘한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다고 선언하는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는 2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누고 찢고 불화하게 하는 모든 장벽들도 다 허물어 졌고, 그래서 교회는 이미 모든 분열을 넘어서소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꾸 하나됨을 확인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좌절하게 됩니다. 그 일은 우리를 자꾸 출발점으로 되돌려 보내기 때문입니다.  따라해 보겠습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로 만들어 놓으셨다” 믿습니까? 인정이 되십니까?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의심될 때마다 되뇌이고 또 되뇌이십시오. 그 의심을 향해서 ‘교회는 이미 하나다’라고 힘차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절인데요.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뭐라고 말하지요? 하나가 되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니까 그것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하나가 되려는 노력과 하나됨을 지키려는 노력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릅니다. 가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은 이미 하나입니다. 부부가 결혼하는 순간 하나인 가정이 탄생합니다. 부부가 결혼한 후에 자꾸 자기들이 하나인가 확인하려고 들고, 또 의심하게 되면 오히려 하나됨이 깨집니다. 아이가 하나 태어날 때마다 또 다시 그 아이와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쓰고, 또 아이가 태어나면 또 다시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고… 세상에 그렇게 하는 가정은 없습니다. 모든 가정은 하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그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과 헌신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됨은 저절로 분명해지고 굳이 확인하려고 들지 않아도 하나인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교회도 가정이지요. 하나님을 한 분 아버지로 모시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됨을 만들고 확인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이미 하나된 것을 지키려는 헌신과 노력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된 것을 지키는 데는 많은 노력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힘써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지키라’는 말은 광장히 느낌이 강한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전쟁중에 병사가 성을 지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항상 그 성을 공격하는 적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적당히 지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도 경험해 봐서 잘 압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끊임 없이 언제나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탄도 교회의 하나됨이 만물이 다시 하나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공격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교회 바깥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교회 내부로 부터 시작되고 내부로 부터 주어집니다. 그래서 더 치명적입니다. 어떤 교회든지 그렇습니다. 사실 공격이 외부로 부터 주어지면 그것은 그리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알아차리기 쉽고, 또 오히려 내부의 결속력을 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이 사실을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절대로 교회를 바깥에서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안에서 부터 공격합니다. 주로 언제 그렇게 할까요? 교회가 움직일 때입니다. 무언가 일을 하려고 할 때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때, 그 때 사탄은 성벽을 공격하듯이 교회의 하나됨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인가가 시작되면 그 교회 구성원들은 의견을 모으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항상 만만치가 않습니다. 분명히 겉으로는 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일을 하는 방법이나 과정을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교만함과 자기 중심적인 성향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우리를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주범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려는 싸움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동기를 살피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실제로 그 싸움이 가장 중요한 싸움이 됩니다. 성벽을 지켜내려는 파수꾼들처럼 스스로 자기 내면을 면밀히 지켜 보아야 하고, 또 우리 안에 남아있는 자기 중심적인 성향에 마음과 생각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 병사들처럼 싸워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하나됨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꽃밭에 잡초가 생기면요. 그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잡초들을 일일이 뽑아내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잡초보다 더 강한 꽃을 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첫번째 방법이 아니라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잡초를 뽑아내는 것과 같은 방법은 교회 안에 상처와 부작용을 남길 수 밖에 없으니까요. 예수님께서도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뽑으려고 들지 말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괜한 알곡을 뽑을 수 있는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를 깨뜨리는 이런 저런 ‘문제’와 싸우라고 말하기 전에, 교회 안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면 성은 지켜집니다. 그렇지만 서로 용납하지 않으면 성은 무너집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성도가 용납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면 용납이란 무엇일까요? 용납은 다른 사람을 참아 내는 것, 그 사람을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불편함과 고통을 감수하고 기꺼이 대가를 치루는 것을 말합니다. 용납은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용납은 항상 부정적인 면을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나와 다른 점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답답한 것, 부족한 것, 지나친 것, 완악한 것, 고집스러운 것, 무례한 것, 거칠은 것, 상식적이지 못한 것, 미성숙한 것, 때로는 교만함이나 악함까지도 참아내고 견디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용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항상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사람들은 용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용납받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용납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많이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하는가,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누군가에게 용납받는 사람이 아니라 용납하는 사람들이 주님 보시기에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용납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용납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용납은 우리 주님의 성품이 맺는 열매입니다. 온유와 겸손, 그리고 인내가 만들어 내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용납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져 가고 있는 성도들 안에서만 맺혀질 수 있는 귀한 열매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높고 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셨지만 주님은 그렇게 대접을 받는 것을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높은 것을 오히려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셨고, 우리의 낮음과 부족함을 탓하고 비난하시는 대신,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우리 주님의 백성으로 남아있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지금도 기다려 주시고 오래 참아주시는 주님의 인내 덕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만물의 찌꺼기처럼 낮추시고 우리를 당신보다 더 귀하게 여겨 주신 덕분에 하나님께 용납되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 그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고 포기하거나 무관심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서로 용납하는 것이 우리가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그렇게 하나됨을 지켜나가는 것에 교회의 교회됨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이 하나됨을 지켜나가는 것에 달려 있는 이유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서로 갈라지고 찢겨진 온 세상과 만물을 다시 하나로 통일시키시는 일에서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여야 하고 하나됨을 지켜내야만 합니다.  


교회가 지켜야할 핵심가치는 하나됨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면서까지 교회가 해야만 하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그래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런 일은 교회에서는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는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의 의견을 너무 내세우면 안됩니다. 그대신 우리 주님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거칠어서는 안됩니다. 그대신 온유해야 합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성급하고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그대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그렇게 해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하나됨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로 부름받았습니다. 병사가 공격당하는 성벽을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해서 싸우듯이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내야하는 자리로 부름받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말을 한 마디 하고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모든 온유와 겸손으로 하기 위해서 먼저, 그리고 우선적으로 힘써 주십시오.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기 위해서 함께 애써 주십시오. 그렇게 우리의 교회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향기로운 성품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것이며, 상처입고 갈라진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평화의 전령들로 훈련되어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됨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된 교회의 복과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의 귀한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교회로 세워져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화평을 전하고 화평케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 
  2. 교회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혹시 교회의 하나됨을 헤친 적은 없는지, 돌아보며 잠시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겸손하고 온유하게 하소서.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용납하는 일에 헌신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