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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6.15.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마태복음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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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6월 15일 수요일


 



현실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삶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려주시고 섭리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뜻이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얼마나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신뢰가 흔들려 버리면 예수님의 다스리심이나 섭리의 유익도 놓쳐버릴 수 밖에 없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도 우리에게 큰 능력이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저 마음의 위로는 되겠지만 말이지요. 


오늘 본문인 14장 말씀은 먼저 그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이 예수님께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인 반응은 놀라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까지 생각했겠습니까? 이것은 그 당시 그 사악한 헤롯에 비친 예수님이 그만큼 대단한 분이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이 평가가 맞는 평가는 아닙니다. 원래의 예수님께 훨씬 못 미치는 평가이지요. 아무리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해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에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로 능력있고 놀라운 분으로, 그리고 두려운 분으로 생각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 뒤에 이어지는 두 가지 이야기, 그러니까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님께서 파도가 높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기적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그분을 믿고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첫번째 이야기인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굶주린 무리들을 보면서 저들을 돌려 보내서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오게 하자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대답하시는 장면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정말 황당하지요? 제자들 말대로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아이가 가져다 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당황해 하고 황당해 하는 제자들에게 그 작은 것을 받아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그것을 남자들만 5천명이 넘는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남기셨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했는데, 이들이 중간에 풍랑을 만나서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건너 제자들에게로 오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놀랐습니다. 어두운데 파도가 몰아치는 호수 위로 사람이 스스르 미끄러지듯이 걸어온다면, 그것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커녕 정말 유령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 오해를 풀어주셨습니다. 이 때 약간은 무모한 성격의 베드로는 또 한 번 모험을 합니다. 진짜 예수님이시라면 자신에게 명령하여 호수 위를 걷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전히 파도가 넘실대는 호수 위를 걸어 예수님께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는 몰아치는 바람을 느끼자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래서 바다에 빠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베드로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는 두 번 의심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했고, 예수님이 계속해서 자신을 물위로 걷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 위로 올라가시면서 갑자기 풍랑은 잠잠해 집니다. 이 일 덕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저 분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역시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현실을 연결하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내가 믿는 바와 내가 사는 바가 이런 식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아직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모습이 성도 개인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모습을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입니다. 다른 뜻에서가 아니라 교회만큼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까지 보아온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너무나 철저히 현실적입니다. 항상 무언가를 결정하고 진행할 때,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 그리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기 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들과 현실적인 계산, 그리고 효율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더 많았고, 그 안에서 믿음과 순종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것을 맨 앞 자리에 놓는 것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원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고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하나님의 부요함을 드러내고,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해 내야 하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반대입니다. 자꾸 스스로 부유해 지려고 하고 스스로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 부와 힘으로 살고 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의 결과는 나올지 모르지만, 일을 해 냈다는 만족을 느낄 지는 모르지만 거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자신도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오병이어만 가지고 있으면 족합니다. 때로는 풍랑이는 호수 위의 작은 배처럼 불안하고 힘이 없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살고 일할 수 있는가, 그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또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해야 할 이유로 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안함과 연약함 때문에, 자신이 있는 그 자리로 예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풍랑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능력으로 풍랑을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믿음이 정말 적은 시대입니다. 성도도 교회도 그저 자기 자신만 보면서 살아갑니다. 부족한 음식을 보고, 발밑의 풍랑을 보며, 불어오는 바람만 두려워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드러내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실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 그리고 우리 교회가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끙끙거리고 먼저 현실적인 방법을 찾는 믿음 없는 자들이 아니라 먼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함으로써 오히려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해 주심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고, 그 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줄 아는 믿음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