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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6.19. 주일오전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에베소서 24)


20160619SM.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15-16절





사람마다 더 좋아하는 종류의 음식이 있지만 저는 중국음식을 제일 좋아합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저희 어머니가 뭐 사줄까 했을 때도,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 달라고 해서 혼자 앉아 그 많은 걸 모두 헤치웠을 정도로 중국음식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중국음식점에 가서 코스요리를 대접받을 때는 기쁨이 충만해 지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그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앞 접시에 조금 담아주고 나서는 큰 그릇을 그냥 가져가 버리니까요.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그저 조금 맛보는 것으로는 크게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먹었으면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한정 눈 앞에 있고, 그 음식을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눈치 볼 일 없고, 게다가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불러오지 않고 살도 찌지 않는 엄청난 축복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황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그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먹고 또 먹으면서 계속해서 더 큰 기쁨과 더 큰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이것과 비슷한 복이 주어집니다. 우리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영적으로 성숙해 간다는 것은 우리 속 사람의 그릇이 커지게 되고, 그래서 거기 담길 수 있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도 그만큼 많아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숙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보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나를 가장 즐겁게 해 줄 진수성찬을 무한정 앞에 놓고서도 위장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다. 풍성함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영혼은 배고픈 사람처럼 예민하고 거칩니다. 일시적으로라면 몰라도 성도가 영적으로 이런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절대로 정상이 아닙니다. 담겨져야 하는 은혜가 더 많은데, 그 은혜가 전혀 담겨지지 못해서 생겨나는 꼭 해결해야 할 이상증상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어? 저건 난데?’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꼭 그 문제를 해결하시면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참 많은 성도들을 보아왔는데요. 그러면서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성숙을 목표로 삼고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언제나 기뻐하고 있었고 신앙생활의 만족도가 높으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루해 하거나 무료해 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성숙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도 가장 행복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이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고,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 선물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사용법에 따라서 우리의 성장을 돕고 성숙을 이루는 은혜의 도구로 바르게 사용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수준으로 계속 성숙해 갈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은혜를 누리며 주신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이 복을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만, 우리 속사람은 강건해지고 커지고 깊어져서 우리 주님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빚어져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시는 말씀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의 통로이며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또 설교를 들으실 때마다, 다른 것을 기대하고 바라기 전에, 그 말씀을 통해 예수님 수준으로 성장해 가는 여러분의 속 사람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그런 기대와 소망을 품고서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왜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의 수준으로 성숙해 가야 하는가 하는 그 이유를 살펴 보았는데요. 이제부터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수준으로 성숙해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바로 그 대답을 담고 있는 그런 본문인데요. 오늘 본문은, 그 구절들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원래는 4장 17절 이후에 나오는 내용의 서론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서론이 다 그렇듯이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대신에 큰 틀만 보여주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틀을 잘 알고 기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틀이 바로 우리가 앞으로 성숙의 길을 갈 때, 우리에게 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15절을 찾으시구요.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그리스도라” 우선 이 말씀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성장의 목표를 제시해 줍니다. 그 목표가 어디입니까? “그에게까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적당한 수준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저 우리가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자라다 멈추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수준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성장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성장의 목표는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맘대로 ‘이 정도면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표는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그 목표를 향해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그 목표가 바로 ‘그에게까지’ 예수님의 수준까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성장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만큼 고상하고 그만큼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예수님 수준으로 성숙해지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범사에”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모든 일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매사에”, “범사에”, “모든 일에” 이런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에 나와 있어도 그렇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해 지고 힘들어 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말로 모든 일에서, 모든 면에서 예수님 수준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하더라도 목표만큼은 반드시 그렇게 세워 놓아야 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오크통이라고 부르는 술통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술통인데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통들은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길이가 똑같은 판자를 옆으로 둥글게 이어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만약에 판자들 중에서 다른 것들은 다 길이가 같은데, 하나의 길이가 짧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담아도 담아도 그 통은 끝까지 채워지지 않습니다. 다른 판자들이 아무리 길어도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만 채워집니까? 그렇습니다. 짧은 판자의 높이까지만 채워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수준까지 스스로를 성장시켜 가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어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예수님의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한 부분이 계속해서 거듭나기 이전의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은 바로 거기까지만 담길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많이 부어 주셔도 허사입니다. 모든 것은 가장 낮은 수준에 있는 판자가 결정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범사’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이 가장 미성숙해 있는지 그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성품, 성향, 기질, 사소한 생활습관, 세속적인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감정, 말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 등등. 가장 짧은 나무판자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꼭 찾아내서 가장 낮고 짧은 것들을 중점적으로 성숙시켜 가야 합니다. 물론 저 자신도 완전하지 못하지만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성도들을 볼 때 참 안타까운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분명히 더 많은 은혜를 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데, 어떤 특정한 곳이 성장이 멈춰 있습니다. 바로 그 부분이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되는데, 그것 때문에 번번히 더 깊고 풍성한 은혜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거기로 줄줄 세는 것이 보입니다. 저도 안타까운데, 하나님을 얼마나 더 안타까워 하실까요? 성도 여러분,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수준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시되, 여러분 속에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담기지 못하게 방해하는 성품이나 습관들을 면밀하게 찾아내시고 가장 취약한 부분부터 성숙시켜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범사에’ 예수님의 수준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범사에 예수님 수준이 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머리되신 예수님 수준으로 우리 자신을 끌어올려서 정말 그 안에 예수님을 온전히 담아낼 정도로 크고 깊은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그것을 큰 틀에서 이렇게 말해 줍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자, 한 번 따라해 볼까요? “오직 / 사랑 안에서 / 참된 것을 하여…”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 수준까지 우리 자신을 성숙시켜서 우리 안에 온전히 그 분을 담아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이 틀 안에서 하려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예수님의 수준으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몸이 머리를 따라가려면 머리의 흉내를 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항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셔서’ 당신의 삶을 그릇 삼아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담아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참된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과연 참된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이 ‘아닌 것’이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이 ‘없는 것’이 참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참된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들의 기준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습니다. 똑같은 것을 요구해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은 행동이 참될 것을 요구하고 행동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동기까지도 살피시며 그것이 참될 때 비로소 참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성도는 위선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위선입니까? 어떤 말이나 일을 하는데, 뒤에 숨겨놓은 다른 생각이나 의도가 있을 때, 그것을 일컬어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우리는 위선적인 행동은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말, 그러니까 언어는 위선적일 때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는데 가장 힘있고 손쉬운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잠깐 우리의 언어생활에 끼어들 수 있는 위선의 문제를 살펴보면서 그것을 통해 우리가 성도로서 행해야 할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요? 이루려는 목적과 얻으려는 것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말을 통해 표현하려고 할 때, 먼저 우리는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생각해 내고 또 사용하는 말이 굉장히 ‘조작적인 성격’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말로 상대방을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서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자기 엄마 옆에서 사탕을 먹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가 그것을 보았습니다. 어떨까요? 당연히 자기도 먹고 싶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원칙대로 하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아주머님, 실례지만 댁의 아드님이 드시는 사탕, 혹시 여유가 있으시면 하나만 주실 수 없을까요? 저도 그 사탕을 먹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대개의 아이들, 특히 머리를 조금 쓸 줄 아는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말할까요? 간절한 눈빛으로 사탕을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옛날에 그거 먹어 봤는데.”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직접 달라고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먹고 싶다고, 그러니 좀 줄 수 없겠느냐고 하는 의사는 강하고 분명하게 표시하려고 합니다. 거절 못할 방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나도 옛날에 그거 먹어 봤는데.”라는 정말 지능적인 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언어를 그저 내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루는 도구로만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거의 본능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머리되신 주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말이 비록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말이 헝크러지면 그 사람의 됨됨이도 헝크러지고 또 그 말이 그 사람이 사는 세상도 더럽힐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구절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저 아닌 것에 대하는 아니라고 하고 맞는 것에 대해서는 맞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자꾸 거기다 뭘 붙이려고 하고, 말을 이렇게 저렇게 바꿔서 이야기한다면 이미 그 때부터 우리의 말은 악해지기 시작하고 그 안에 죄가 끼어들어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혹시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다 보면 꼭 이루어야 할 선한 목적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그런 식으로라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항상 100퍼센트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두 가지만큼은 생각해야 하고 우리 말을 여기에 맞춰가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첫째, 선한 목적은 선한 과정과 선한 수단을 통해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한 과정과 수단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루지 못할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정말 선한 목적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 목적이 정말 위선의 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목적인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점들을 점검해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이루려는 일들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만약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그런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온 세상을 가장 선하게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당사자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꼭 이루어져야 할 선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과연 이 세상에 우리의 위선과 거짓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나 선한 일이 과연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악한 행동이 꼭 필요한 하나님의 목적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선한 일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참된 말을 하고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내 욕심이 거기 들어가 있기 때문이고, 그 일을 꼭 ‘내가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교만한 마음이 끼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 악한 것들을 끼워 넣어야만 하는 성취할 수 있는 일들을 만나게 되면, 적어도 우리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잠시 멈춰야 하는 장소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그 곳이 그 일 자체를 하나님 앞에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자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참된 것을 하라’는 주님의 명령 아래서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만 예수님 수준으로 자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참된 것을 하되 사랑 안에서 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된 것을 한다는 미명하에 사랑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사랑 안에서 하려고 애쓸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이 참된 것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 무엇이지요? 사랑은 막연한 호의나 친절이 아닙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이의 진짜 유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찾아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꽤 친한 친구가 뻔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고민이 되지요. 이걸 말 해줘야 하나, 말하지 말아야 하나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쪽에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굳이 말해서 관계를 힘들게 하고 또 내가 오해받을 일이 없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말해줘야 한다, 관계가 망가지더라도 오해를 받더라도 알려줘야 한다.’ 친구지간에는 많은 경우에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합니다. 그런데, 부모자식지간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부모라면 분명히 말합니다. 자식이라면 결국에는 알려 줍니다. 그러면 안된다고, 그러는 것은 어리석고 악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혼을 내고 충격을 주어서라도, 그래서 관계가 나빠지더라도 꼭 말해 줍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날까요? 대개 친구 사이에는 그런 위험이나 불편함을 감수할만큼의 사랑이 없지만, 부모자식 사이에는 그런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하면 참된 말을 하고 참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사랑하면 나의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말씀은 참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참된 말을 하고 참된 행동을 할 때도,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참된 것은 자칫하면 칼이 되고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칼을 다루는 능숙한 요리사처럼 지혜롭고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짜로 사랑해야 진짜로 참될 수 있고, 참된 것만이 참된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참된 것이 진짜 참된 것이 되고 그 참된 것이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해서 머리되신 예수님 수준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교회 또한 성숙한 교회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으므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느니라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가 ‘좋은 교회’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만, 그렇다면 과연 진짜로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큰 교회입니까?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고, 환경이 좋고, 백화점처럼 원하는 것은 모두 할 수 있는 그런 교회일까요? 물론 이런 교회들도 좋은 교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좋은 교회’가 되는 조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적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는 조건은 ‘성숙함’입니다. ‘성숙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의 수준에 더 가까이 다가간 교회일수록 더 좋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있는 교회일수록 더 좋은 교회입니다. 이 조건이 갖추어 지면 그 어떤 교회도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지만, 이 조건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교회도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교회란 성도들로 이루어진 ‘몸’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성도들 사이에 참되지 않은 것들이 끼어 있고, 사랑이 없다면 과연 그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제대로 세워져 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교회인 우리, 그 교회의 멤버들인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머리되시는 예수님 수준으로 성장해 가려면, 그래서 우리가 속한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려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오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행하는 참된 것’은 우리 몸 속을 흐르는 혈액과도 같습니다. 혈액 속에 불순물이 섞여 있으면 안되는 것처럼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이 흘러야 합니다. 거기에 무슨 자기 입장이나 이기심, 그리고 참되지 않은 거짓되고 위선적인 것들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을 하기 전에 그 말이 사랑 안에서 하는 참된 말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것이 사랑 안에서 하는 참된 일인가를 먼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말하시고 그 다음에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자라게 하고, 우리 교회를 예수님 수준으로 세우는 방법입니다. 


따라 해 보겠습니다. “오직 / 오직 / 사랑 안에서 / 참된 것을 말하라” “오직 / 오직 / 사랑 안에서 / 참된 일을 하라” 꼭 기억하시고 이대로 하기 위해서 애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만 생각하고 참된 것을 함으로써 자신을 성숙시키고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 그래서 더 많은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담아 온 세상으로 흘려 보내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