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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6.21.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마태복음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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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6월 21일 화요일


 



‘정의’는 일반적으로 공정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한 만큼 받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 정의는 한 나라나 혹은 사회가 유지되고 지켜지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의가 지켜질 때, 사람들은 그 정의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자기 자리에서 바르게 그리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바르고 성실하게 산 만큼 나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정의가 지켜지고 또 정의를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깨어졌을 때,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도 정직해야 할 이유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때로는 최소한의 정의도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꾸 더 높은 자리,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 몫을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서 그런 사회 안에서라면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당시의 정의가 깨어진 세상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그런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우선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는 청탁을 넣었던 것,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다른 제자들이 분해했던 것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오해해도 너무 크게 오해했기 때문에 생겨난 행동이고 반응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처럼 정의로운 나라가 없습니다. 그 나라의 정의는 완전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많이 다릅니다. 그 나라는 은혜 안에서 정의가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사용하신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은혜 안에서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약속한 한 데나리온씩 어김없이 주시니까요.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하루 품삯이며 4인 가족 기준으로 해서 하루치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데나리온은 꼭 필요한 것, 부족하면 안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굶게 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꼭 필요한 은혜,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무엇일까요? 저는 구원의 은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 은혜는 받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주실 때, 다른 조건을 전혀 보지 않으십니다. 몇시에 포도원에 왔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심지어는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느냐 하는 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누구에게나 똑같이 약속하신 대로 한 데나리온씩을 나눠 주십니다. 모두 다 구원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세상 방식의 정의에만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몹시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평생 예수 믿은 사람 그리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신앙생활한 사람이 받는 구원이나 평생 자기 맘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참 믿음을 고백한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 그러니까 똑같은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니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최소한 필요한 은혜에 대해서는 차별을 두지 않는 정의입니다. 꼭 필요한 것을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하나님 식의 정의이니까요. 그렇지만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받는 은혜가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서 공평, 불공평을 따질 자격이 없습니다. 모두 다 죄인이었으니까요. 은혜를 받기 전의 모든 인간의 처지는 마치 새벽부터 하루 밥벌이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인력시장에 나온 일꾼들과도 같습니다. 일꾼이 필요한 사람이 와서 데리고 갈 때까지는 일할 곳을 얻을 수 없고, 그러면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런 일꾼들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입니다. 언제 일을 시작했든지 한 데나리온을 약속받았고, 또 약속된 금액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이니까요. 


이런 은혜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구원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면 그 어떤 은혜도 우리에게는 한 데나리온이 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가 얼마나 고맙고 큰 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알기에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자신을 높이려고 들까요? 더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거나 인정받기 위해서 공치사를 하려고 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찾아와 치유를 구했던 두 명의 맹인처럼 그저 예수님 앞에서 꼭 필요한 은혜만을 구할 것입니다. 은혜 앞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테니까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요구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정의를 이야기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내가 한 일이 없이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그 은혜 안에 있음을 알고 겸손히 자신을 낮출 수 있으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은혜 앞에 겸손하며, 은혜만 구하고 살아서 은혜의 은혜됨을 알고 누리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