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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6.26. 주일오전 - 모든 성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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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디모데 후서 3장 10-17절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러 이 자리에 왔고 또 지금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속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예배행위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모든 절차가 똑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비중있는 중심이 되는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설교시간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를 만나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영혼을 만지시고 고치시며 위로하시며 채워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예배의 행위들도 은혜의 통로가 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은혜의 통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런 역할을 하도록 이미 성경이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우리가 함께 하나님 말씀을 직접 대면하는 설교시간은 예배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예배 순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더 설교에 귀를 기울여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더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은혜와 위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신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다분히 ‘내 감정’ 중심입니다. 물론 감정은 신앙에 있어서 생략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떤 분들은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신앙이 전인적인 것, 그러니까 우리의 인격 전체가 개입되어야 하는 일이어야 한다면, 감정적인 요소 또한 포함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감정이 움직이고 감동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없는 신앙,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신앙은 신앙은 충분히 건강한 신앙이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우리 신앙의 기초나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감정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그 스스로는 방향과 올바름을 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중심은 ‘앎’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바른 방향으로 움직여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이미 기록된 것입니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바뀌지 않습니다. 중심의 역할을 해 주기에 충분하고 또 방향을 알려주기에 충분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성경의 진리를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성경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켜주고 새롭게 해 주는 능력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디모데 후서,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두 번째 편지 속에 포함되어 있는 말씀인데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쓸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고 있었던 에베소에는 이단들이 점점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단이 뭔지 아시지요? 이단은 진짜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끝까지 가 봐야 겨우 본 모습을 드러내는 교묘한 가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에베소에서는 이런 이단들이 아직 어리고 약한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아 복음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서는 아주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가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했고, 그것을 위해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처방을 내려 주었습니다. 첫번째 처방은 “그들과 싸우지 말라”는 것이었고, 두번째 처방은 “이미 배운 것들을 견고하게 붙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처방은 사실 소극적이고 약해 보입니다. 과연 이단을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단과 직접 싸우는 일이 복음과 교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단과 싸우다 보면 그들과 이전투구를 벌이게 되기 쉽고, 그러면 오히려 그 싸움 때문에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는 일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단과 싸우지 않고 이단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그 방법이 바로 “이미 배우고 확신한 일”을  더욱 견고하게 붙잡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진짜라는 확신이 있어도, 사람들이 그 길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따라오지 않으며 반대로 거짓된 것에 더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 화가 나고 또 좌절하기 쉽습니다. 이럴 때 가장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해결방법이 있다면 그 거짓된 것과 직접 싸워서 진짜의 진짜됨을 증명해 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싸움으로는 진짜의 진짜됨을 증명해 내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런 증명은 이미 진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짜가 왜 진짜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짜는, 이단은 처음에는 진짜를 따라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진짜를 흉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진짜 편에 서 있다면 이단이 조금 힘을 얻는다고 해서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습니다. 그 가짜는 결국 스스로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이미 말씀드렸듯이 진짜는 진짜여야 하고 계속해서 진짜의 자리를 지켜가야 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자신을 가짜와 차별두어야 합니다. 


요즘은 아주 약간 그 힘이 약해진 것 같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신천지라는 이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연 신천지가 나타나기 전에 한국교회가 진짜 기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가 믿는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쳤고, 그래서 성도들이 이미 진짜를 믿는 진짜다운 진짜가 되어 있었다면 그래도 신천지가 그렇게 위세를 떨쳤을 것이고, 심지어는 교회 하나를 통째로 집어 삼킬 정도로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천지가 나타나기 전에 한국교회가 이미 성경의 진리를 알고 또 확신하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면 그래도 신천지는 이렇게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신천지가 힘을 얻어갈 때, 저는 사실 내심 기대도 했었습니다. 이제는 이 땅 위에 정신을 차리고 참된 의미에서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고 믿는 바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교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거의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신천지에 대해서는 정말 눈에 불을 켜고 경계하고 또 정면대결을 펼치면서도 교리교육이나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도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일로 돌아가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신천지는 기존 교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 아주 나쁜 생각과 감정적인 경향들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교리를 배우는 일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것을 예수 믿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 덕분에 기독교는 자신이 믿는 진리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풍성하고 능력있는 것인지 거의 알지 못하는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계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기독교는 교리가 전부인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성경의 진리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그 모든 성경의 진리들이 전부 ‘교리’이고, 그런 교리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리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이번 기회에 꼭 그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짜를 제대로 충분히 배울 수 있게 되고, 그 다음에 우리의 신앙은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하는’ 거짓을 이기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 그러니까 ‘성경의 진리’에 거하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당한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성도 여러분,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무엇이 그가 평생 가르친 교훈의 중심이었고, 무엇이 그의 행실과 삶의 목적까지 바꾸어 놓았으며 무엇이 그를 그런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오래참고 인내하며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의 진리’였습니다. 그를 바꾸어 놓은 것도, 그런 대가를 기뻐하면서 감당하도록 한 것도 모두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였고, 그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의 능력’이었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알려준 성경의 진리가 가지고 있는 첫번째 능력이고 유익인데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넉넉한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주는 책이라는 점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얻는 구원’과 ‘이루어 가는 구원’이 있는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얻는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것도 성경책 밖에 없습니다. 만약 성경에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얻는다는 말씀이 없다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구원을 완성시켜 나갈 때,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며, 그 믿음을 어떻게 성숙시켜 가야하는지를 바르게 알려주는 책도 성경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 길을 찾고 길을 가는 법을 배우고 계속 그 길을 따라가야 비로소 완성된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책이고 성경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성경은 단순히 옳은 이야기,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인생을 위한 참고서 역할을 해 주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근본족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입니다. 성경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를 지혜롭게 해서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책,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이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런 놀라운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원래는 하나님의 숨결로 부터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숨결이 무엇입니까? 숨결은 생명입니다. 태초에 사람을 살아있는 영이 되게 했던 바로 그 생명이며, 혼돈과 공허를 품어 만물이 되게 하셨던 그 성령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도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다시 살리시는 영입니다. 마른 뼈가 많은 군대가 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하시는 말씀의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생명이 숨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능히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경말씀이 성도들 속에서 일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빠져있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가르칩니다. 이전에는 잘못가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도 몰랐던 그 길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길인지를 알려주며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게 배우고 책망받은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바로잡기 시작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꿉니다. 가치관을 바꾸고 삶의 목적을 바꿉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인으로써 성숙해 가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배우는 일을 할 때, 어디에 관심과 목적으로 두고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일으키는 참된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치유가 아닙니다. 일시적인 위로나 확신을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을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고 능가하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성경의 진리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혼의 변혁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우리를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갑자기 성경 자체에 대한 설교를 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지난 두 주간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그러니 그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래서 또 한 번 성경이라는 책 자체가 얼마나 귀하고 중한 책인지를 말씀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을 새로운 마음과 생각으로 교훈하며, 책망하며, 그래서 바르게 하고 여러분을 의인으로 양육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습니까? 우리의 잘 변하지 않는 마음과 완고한 생각, 그리고 의롭지 못한 삶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강력한 능력과 생명이 이 성경 속에 있다고 진실로 믿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또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우리 속에서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난다고 믿습니까? 성경말씀이 우리 속에서 이런 변화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되어준다는 것을 믿습니까? 성경이 그만큼 중요하고 힘있는 책이고 그래서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어 냈으며 경건한 자, 말씀을 지키며 소중하게 여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핍박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넉넉한 지혜를 공급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만큼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 무엇보다도 가치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그만한 값어치만큼 귀하게 여기고 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은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자로 세워주고 또 아름답고 선한 자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성경에 우리를 내어 맡길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만이 그럴만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고, 성경만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만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하나님 말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과 참된 가치를 아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더 사랑하고 말씀을 더 기뻐하며 말씀을 더 가까이 하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성장해 가고 말씀 안에서 더 온전해져 가는 귀한 변화들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람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