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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8.30.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요한복음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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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8월 30일 화요일




사람은 대개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편견이 없고, 치우침이 없고, 특별히 누구의 편을 들지 않는 아주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생각이 편견이고, 자신에 대한 편견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세상에 객관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무엇을 듣고 보기 전에 했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아는 어떤 것,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고집이라는 것을 가지게 마련인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면 그런 것들을 틀로 삼아 해석한 후에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편견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일 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편견과 주관적인 생각을 줄이려면 우선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무언가를 아는 일에 대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생각하고 또 바라볼 때는 나는 편견이 있고 나는 주관적인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부분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대한 드러나는 사실만 보고, 그 사실이 증명해 주는 것만을 받아들이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제일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있던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쳐준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희망은 있었습니다. 가끔씩 천사가 연못 물을 움직이게 할 때, 거기 처음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고침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희망은 이 병자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몸을 해서는 절대로 제일 먼저 연못 물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기회를 놓친다고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 한 마디로 그 질병을 완전히 고쳐 주셨습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핍박을 더 심하게 받게 되었지만, 사실 이 일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병에서 자유케 하고 또 그에게 안식을 주었던 그런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고치신 것은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라고 쉬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 때도 망가진 인생들, 망가진 이 세상의 구석 구석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가장 큰 절망가운데, 가장 오래 머물러 있어서 안식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바라본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는 중풍병자의 질병보다 더 오래된 편견과 아집이라는 영혼의 질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사람을 고치는 일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전부가 다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증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모든 증거들은 아얘 생각해 보지도 않고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주는 거부감에 사로 잡혀서 그렇게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면서 심한 불신앙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19절부터 47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런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따끔하게 한 마디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전부 다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 일들 자체가 전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증거하는 증거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44절에 보면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영광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하려고 하든, 또 남이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든 자신을 높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아집과 편견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 영광을 위해서 땅위의 영광,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이 주는 영광에 마음이 빼앗겨 있으니 그러기가 싫고 그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생의 길이 눈 앞에 있는데도,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과 낮은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복된 마음입니다. 땅의 영광에 마음 두지 않는 것 만큼 복된 것은 없습니다. 그런 마음에만 복음은 제대로 깃들 수 있고, 참 믿음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처럼 욕심이 없다고 속 상해 하면 안됩니다. 남들이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고 화가 나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편견과 아집 없이 주님을 섬기며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