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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9.02.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요한복음 0737-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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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9월 2일 금요일





오늘날에는 통신수단이 너무 발달되어서 우리가 맘만 먹으면 우리가 가진 휴대폰을 가지고도 듣고 싶은 설교자의 설교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설교를 많이 듣는 것은 신앙에 도움이 되니까요.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 된 것은 성도들에게 참 좋지 않은 습관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 설교자, 저 설교자의 설교를 듣다보니 성도들 중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설교 소비자’가 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식당은 이 것이 좋고 저 식당은 저 것이 좋다고 평가를 내리듯이 여러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의 청취자의 자리를 떠나서 설교를 평가하는 평가자가 된 것입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더 많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잘 알고, 성경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설교를 청취하는 태도로도 적절치 못하지만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신앙성장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를 통해서 말씀이 주는 은혜와 영광을 경험하고 속 사람이 변화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 와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8장 30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 엉뚱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을 말로 옭아매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겼을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예수님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모세는 이런 사람은 즉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라고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놓아주라고 하면 율법을 무시했다고 공회에 고소하고, 죽이라고 하면 로마 법을 어겼다고 로마 당국에 고소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여인에 대한 정죄를 끝낸 상태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정죄도 끝낸 상태였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옭아맬 구실만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실제로 거기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전부가 다 그 여인을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돌로 치려면 죄가 없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양심을 찔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고 결국에는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잘 잘못은 가려야 하고 그에 걸맞는 벌을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판단을 하고 벌을 부과하는 사람이 그럴만큼 의롭거나 또한 그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사회와 신앙과 인간됨을 지키는 ‘궁여지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럴 자격을 가질 정도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것 또한 자신의 권리인 양, 자기 손으로 자신이 정죄한 사람들을 벌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정죄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으셨습니다. 그를 죽이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정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앞으로는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시고서는 자신의 삶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의 잘못을 가려내고 정죄하고 벌을 주는 데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시는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주의 재판관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계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사람이든, 말씀이든 그 대상을 함부로 평가하고 정죄하며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재판관이 아니라 다 같은 죄인들이고, 말씀의 평가자가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청취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설교이든 또 하나님의 말씀이든 우리가 함부로 이리 저리 평가하고 판단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참된 믿음에 이르기가 정말 어려워질 것입니다. 참 믿음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항상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의 마음에만 깊게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자리를 잘 지키는 사람들로 남아서 그 마음에 참 믿음을 키워가는 겸손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