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16년 9월 27일 화요일
사도행전 6장에서 교회는 일곱 집사들을 세웠습니다. 사도들이 구제를 위한 재정업무까지 맡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아서 특별히 그 일을 맡기기 위해서 였지요. 그렇지만 이 일곱집사들은 그 일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7장에는 그 일곱 집사들 중의 한 명인 스데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보면 스데반이 한 일은 사도들이 한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6장 8절은 스데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주셨던 은혜를 스데반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이적을 행했습니다. 물론 그래서 스데반도 사도들이 겪었던 고난을 똑같이 겪어야 했습니다. 모함과 핍박을 당했고, 결국 사도들보다 앞서 교회 역사 속에서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7장은 스데반이 행한 복음설교가 중심내용이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을 오늘 새벽에 살펴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스데반이 진리를 전했을 때의 군중들의 반응, 그리고 군중들의 반응에 대한 스데반의 반응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가 다 끝났습니다. 군중들은 화가 났습니다. 왜 화가 났을까요? 설교가 너무 길어서 화가 났던 것일까요? 그러기나 했으면 다행이지만 그런 일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54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군중들은 이를 갈 정도로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마음에 찔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깨달아야지요. 깨닫고 돌이켜야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지요. 그런데, 그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고 또 믿는다고 자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음에 찔리자 회개하고 돌이킨 것이 아니라 이를 갈았고, 결국 스데반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풀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런 일은 정말 수도 없이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냈을 때, 그들은 거의 매번 그들을 핍박하고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셨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은 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 자체가 그 사람을 저절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든지 간에 항상 주의 깊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그 이유만으로 말씀에 무관심해지거나 말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반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나 아니면 영적으로 깊은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 말씀을 거부하고 화를 냅니다. 그런 말씀이 들려올 때마다 애써 외면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들을 전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의 신앙적인 상태는 그런 불편한 말씀과 그런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향한 그 사람의 태도로 알 수 있습니다. 듣기 좋고 위로가 되고 달콤한 그런 말씀들이나 그런 말들을 들려주는 설교자들이 아니라 말입니다.
반면에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서 서슬퍼런 눈빛을 하고 지켜보고 있는 군중들 앞에서도 결코 진리에 대해서 타협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을 향해서 부당하게 분노를 폭발시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합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말이지요.
무리들은 스데반이 전한 말씀이 맞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한 스데반에게 이를 갈고 결국 그를 죽입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은 그 말씀이 맞기 때문에 그 말씀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심지어는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진리는 그런 것 같습니다. 항상 이렇게 칼이 되어서 사람들을 둘로 나누고 진리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추함을 드러내지요. 우리는 스데반과 군중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진리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정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스데반처럼 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말씀이 맞기 때문에, 그 맞는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말씀을 외면하고 거부하며, 그런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불편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께 대한 태도이고 그것은 곧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테니까요.
항상 진리 앞에 겸손한, 그래서 진리가 들려질 때 아파도 달게 듣고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돌이킬 줄 아는 우리들, 그 진리를 위해서 헌신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