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에베소서 6장 5절-9절
-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성도들은 인간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에베소서가 대표적으로 다루고 있는 인간관계는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그리고 종과 주인의 관계 이 세 가지 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이미 두 가지를 살펴 보았는데요. 잠시 복습을 하고 오늘 말씀을 함께 살피겠습니다. 우선 아내가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가지는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이었지요? 순종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주님께 순종하듯이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는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부모로서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는요? 부모는 무엇보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하며, 세상의 가치나 자기 생각이나 욕심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얼핏 살펴 보아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우리의 본성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요. 그렇지만, 이 모든 말씀들은 절대로 우리에게 짐으로 지워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려고 할 때, 등에 짊어진 배낭이나 꼭 지켜야 할 등반수칙들이 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은 마치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산에 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맨 몸으로 아무런 도구들도 없이 그저 그 산을 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들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지 잘 압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더 중요합니다. 이 말씀에 100퍼센트 순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고, 이 말씀들을 여러분이 행복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꼭 필요한 귀한 말씀으로 여기시고 최선을 다해 소중히 지켜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고 세워갈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그런 가정이 되게 해 줄 것입니다.
- 종들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종과 상전, 그러니까 그 종의 주인과의 관계를 살펴볼텐데요. 그 중에서도 오늘은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주신 말씀만 함께 살피겠습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는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간관계입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지구 상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말씀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로마의 노예제도를 살펴보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도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노예라는 말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미국의 흑인노예들이나 아니면 옛날 우리나라 종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비참한 그림들이 우리가 노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굉장히 강력한 선입견이지요. 그렇지만 로마시대에는 전쟁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을 제외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노예들 보다는 우리나라의 ‘머슴’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 노예들이 훨씬 더 많았고, 그들은 머슴보다 훨씬 더 큰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집 밖에서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약간의 재산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자유를 누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노예제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생계수단이 되어주는 아주 요긴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의 몸 밖에 남은 것이 없는 딱한 상황이 될 때,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댓가로 가정의 생활을 이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 당시 노예제도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노예제도와는 정말 많이 다릅니다. 그 당시 종과 주인의 관계는 요즘으로 치면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와 많이 닮아 있고, 또 그래서 이것과 비슷한 다른 관계들과도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이미 노예제도가 없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함께 귀기울여야 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어떤 의미로든 누군가의 아래에 있고, 또 봉급이나 댓가를 받고 누군가를 위해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종들에게 첫번째로 요청한 것은 ‘순종’이었는데요.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라”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종들에게 기분좋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종들은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일만 합니다. 그렇게 주인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런 그들을 향해서 이런 요구를 했으니 종들이 바울의 말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아마 정말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고 있는 아이에게 이제부터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는 소리처럼 들렸을 지도 모릅니다.
우선 바울은 종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주인들이 너무 무서워서 그 공포 때문에 주인 앞에서 벌벌 떨면서 순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말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는데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또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할 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두려워하고 떨게 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보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로 실패하거나 망치면 안되는 일들을 할 때 두려워하고 떨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렇고, 또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이 그렇지요. 둘 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고 절대로 실패하면 안되는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두 경우를 이야기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지금 종이 자기 주인에게 순종하는 일을 그런 일들과 똑같이 중요한 일로 보고 있습니다. 그저 상전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 뿐인데도,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에 순종할 때처럼 그런 태도로 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종들의 마음의 동기의 문제까지 거론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말 뒤에 무슨 말이 나오지요? ‘성실한 마음으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실한 마음’은 ‘진실한 마음’을 말하고 또 ‘동기가 순수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거짓된 마음이 없이, 순전히 주인을 위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까다롭고 거친 주인이나 때로는 너무 심한 요구까지 서슴 없이 하는 주인을 두고 있는 종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면, 과연 그 종은 이 말에 기쁜 마음으로 쉽게 ‘아멘!’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말하는 바울을 원망하고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바울은 종들을 향해 주인에게 순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3. 종들은 주인을 주님을 섬기듯이 섬겨야 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종들에게 한 두번째 요청으로 넘어갈텐데요. 바울이 종들에게 두 번째로 요청한 것은 주인을 ‘섬기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앞에 나온 ‘순종’은 주로 어떤 구체적인 요구를 받았을 때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한다면, ‘섬김’은 좀 더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일들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요즘 느낌으로는 ‘섬긴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고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원래 이 말은 그저 종의 일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보면 섬김은 종들이 늘상 하고 있는 귀찮고 자질구레한 그런 일들, 또 힘이 많이 드는 노역 같은 일들을 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종들에게 종들이 늘상 해야하는 이런 일들을 할 때도 대충 형식적으로 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대신 이렇게 말하지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잘 아시다 시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그러니까 사람의 눈에 드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제대로 일하는 척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눈가림’ 즉, 아이 서비스(eye-service)인데요. 바울은 예수를 믿는 종들은 제일 귀찮고 힘든 종의 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허드렛 일을 할 때조차도 그 일이 억지로 하는 eye-service가 되게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마음의 섬김’ 그러니까 heart-servce가 되게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믿는 종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아무리 로마시대의 종들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종과는 다르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종은 여전히 종입니다. 종의 삶은 언제나 고단하고 힘겹습니다. 종이라는 사실 자체로 억눌리고 비참하지요. 그렇지만 바울은 그런 종들에게도 이런 과한 요구들을 했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주님께 하듯 순종하고 주님을 섬기듯이 그렇게 섬기라고 말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권리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우리들도 바울의 이런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상사와 회사를, 우리가 만나는 고객들을 그렇게 대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것을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저 일만 제대로 하면 됐지, 물건만 잘 팔면 됐지 나에게 그런 것까지 요구하지는 말라고 잘라 말할 것입니다. 특히 요즘에는 인권과 자존심이 거의 신처럼 숭배를 받고 있는데, 요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미 충분히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종들에게 그런 과도한 요구들을 해야만 했을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예수를 믿게 된 종들은 이제 사람의 종일 뿐만 그리스도의 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몇 주 전에 ‘속량’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속량은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속전’이라고 부르는 값을 대신 지불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이 속량은 전 주인에게서 그 노예를 사는 것이 됩니다. 그저 값을 지불한 사람이 그 노예의 주인이 되지 않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그 노예는 누구의 소유가 될까요? 그는 이제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될까요? 그러면 그 자신이 주인이 될까요? 아닙니다. 그 때부터는 그 노예는 신의 소유가 됩니다. 로마시대에는 자유인들을 신에게 속한, 신을 섬기는 사람들로 생각했었는데요. 그래서, 그 때부터 그 노예는 자유인이 되어서 자유롭게 신을 섬기는 신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도 이치가 똑같습니다. 주님은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속량해 주시려고 주님의 목숨을 속전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우리를 주인 없는 상태로 만들거나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되게 만드는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이 자유는 우리를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는 그런 자유입니다. 우리가 속량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로운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 순간 우리의 삶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하는 일은 이전과 똑같습니다. 학생은 학교에 다니고, 회사원은 회사에 다닙니다. 농부는 농사를 짓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상인들은 물건을 팝니다. 주부들은 집안 일을 돌봅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가지는 의미 자체가 왼전히 달라집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다 하나님의 종으로 하는 일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단순히 내가 하는 일이나 직업이 아니라 말이지요. 성도들은 그렇게 이전에 하던 것과 똑같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이라도 이전과 똑같은 마음과 방식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앞에 나온 종들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예수를 믿어도 종은 여전히 종입니다. 그러나, 이제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고 주인의 일을 돌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종은 이전에 하던 일들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주인에게 순종할 때는 하나님께 순종하듯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인의 일을 돌볼 때는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듯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면서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순종하라고 했던 것이고, 그리스도의 종들답게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종답게 살며 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예전에는 그저 사람의 종이었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 앞에서만 잘 하면 되었고, 또 일만 제대로 하면 되었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람은 누구에게 진짜 보상을 받게 될까요? 주님입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그 모든 수고를 정산해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 다릅니다. 겉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을 보십니다. 일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를 보시고 그 일을 하는 태도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은 이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마음을 실어서 하려고 애쓰며 살게 됩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고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 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라고 말입니다.
4.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일을 합니다. 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혹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변화된 우리 삶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섬기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꼭 어떤 사람의 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회사와 일터에서 봉급을 받고, 누군가의 부하직원으로 일하며, 또 누군가에게 서비스나 물건을 제공하면서 그 댓가로 얻은 것으로 삶의 필요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를 섬기고 있고 또 섬겨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상에 속한 일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속량받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 일들과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섬겨야 하는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일터에서, 또 가게와 거래처에서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날 때, 언제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모든 사람들을 주님 대하듯 대하기 위해서, 모든 일들을 주님의 일을 하듯이 하기 위해서 애써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선한 일을 행하든지 행한 그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렇게 심으신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여러분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주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 주님을 위해서 심을 때, 그것을 주님의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에게 맡겨진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삶을 사는 복되고 아름다운 주님의 종이 되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