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16년 11월 4일 금요일
설교분문 : 시편 19편 11-14절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바르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을 듣지 않으려고 하고 또 듣더라도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변화나 발전 없이 똑같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어떤 잘못이 반복되고 실수가 반복될 때,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참된 사랑 치고 이런 짐을 지지 않는 사랑은 없습니다. 마냥 좋기만 하고 좋은 이야기만 들려주는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진실로 그리고 깊게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만큼 우리를 크고 깊고 진실되게 사랑하는 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야 다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나온 이야기를 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절대로 그런 마음에서 나온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짓고 또 잘못된 길로 고집을 부리며 가는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만 하실 수가 없습니다. 당장 듣기에 은혜로운 말씀만 들려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이 우리를 편들어 주고 격려하는 말씀보다 오히려 우리를 따끔하게 혼내고 또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들이 더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없이 항상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언제나 문제를 가지고 있고 바르지 못한 길을 선택할 때가 더 많은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철든 자녀가 자신을 혼내는 부모의 따끔한 매질과 훈계 속에서 부모의 깊고 풍성한 사랑과 애정을 발견하듯이 말입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또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꿀보다도 더 달게, 많은 순금보다 더 귀하게 여길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그 이유는 다윗이 말씀의 긍정적인 은혜들을 수없이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다양하고 풍성하게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기를 꾸짖으실 때, 그 말씀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경고하고 혼낼 때, 그것을 언짢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가 가려는 방향을 막아서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경고의 메세지를 보내오면 자기 고집을 꺾고 그 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래서 큰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을 막아설 때, 거기 순종하면 그저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는 ‘제로’ 상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듣고 거기 멈춰섰더니 계속해서 큰 상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저 죄를 짓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는 일은 그저 아무런 투자를 안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선한 일도 행하지 않은 것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나중에 얻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생각해서 만약에 그 경고를 듣지 않고 그냥 무시했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마치 잘못된 투자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손해를 입게 됩니다.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됩니다. 그러니 일단 제로에 머물러 있기만 해도 결과적으로 보면 본전이 아니라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말씀의 경고를 받고 잘못된 투자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또 다른 어딘가 투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어디에 투자하게 될까요? 아마도 선한 곳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했을 때보다 그런 결정을 훨씬 더 많이 내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선한 씨앗들은 우리에게 선한 열매로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만 무시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인생에 악한 씨앗을 심는 일을 많이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선한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일은 결국 우리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의 삶을 선한 열매들로 채워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쁘고 복된 고백을 이어가던 다윗은 13절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하나님께 간절한 간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편 19편의 결론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갑자기 하나님께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굉장히 갑작스러운 변화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우리들도 말씀을 읽을 때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 행복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읽어내려 갑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을 계속 읽어내려갈수록 그 말씀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사람의 눈으로 나도 이 정도면 참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정말 그게 그런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 까지도 죄라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알게 됩니다. 그 동안 자신이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정말 죄많고 악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누구리요?” 라는 다윗의 탄식은 바로 그래서 터져 나온 탄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 죄이고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마음과 생각의 죄를 드러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가 죄인 줄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 인생에 악한 씨앗들을 뿌리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결론을 만나게 될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또 죄를 죄로 알려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숨어있는 죄의 정체를 드러내 주어서 우리가 그 죄를 죄로 깨닫게 해 주고, 그 죄로 가까이 가지 않게 해 줍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무감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나를 숨은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경고해서 악한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 주는 것이 독감예방주사를 맞는 것과 같다면, 말씀이 우리의 숨은 죄를 깨닫게 해주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만들어 주는 일은 이미 독감에 걸렸을 때,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항생제 주사를 맞는 것과도 같습니다. 둘 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주사들을 맞아야 죄를 막을 수 있고, 또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예방과 치료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숨겨진 죄의 실체를 보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알면서도 지었던 죄들이 얼마나 크고 악한 죄였는지도 제대로 보게 됩니다. 숨겨진 죄도 그렇게 큰 죄가 된다면 알면서 지은 죄, 고의로 지은 죄는 더더욱 큰 죄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다윗이 드린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않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리이다”라는 기도는 바로 그런 마음에서 나온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만나기 전에 사람은 죄가 죄인 줄도 모릅니다. 그리고 죄인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죄를 고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비춰주시면 우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되고, 자신에게 있는 죄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그게 얼마나 악한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얼마나 멀어지게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악한 열매로 되돌아오게 될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결국 거룩하고 순결한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품게 되고, 그렇게 되는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간구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바라나이다” 이 기도는 진정으로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본 사람의 기도입니다. 정말로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본 사람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신의 반석이 될 수도 없고, 자신을 구속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반석으로, 하나님을 구속자로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세워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주셔야 한다고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선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부족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고 자신의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하나 밖에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을 반석으로, 구속자로 부르면서 자신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고 그 은혜를 구하며 그런 소원을 품고 기도하며 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고맙고 좋은 것입니다. 꿀보다 달고 많은 순금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말씀이 주는 진짜 은혜는 우리를 우리 자신을 보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면, 그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모습을 보게 만들어 주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죄를 죄라고 경고해 주고, 지은 죄를 회개하게 만들어 주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 우리의 아픈 곳을 들춰내고 부끄러운 곳을 드러낼 때, 그것을 불쾌해 하거나 그 말씀 앞에서 귀를 막아서는 안됩니다. 아파하면서도 들어야 하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경청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통해 오는 경고는 은혜입니다. 책망도 은혜입니다. 우리의 죄를 들춰내고 회개하게 하시는 것 또한 말씀을 통해 주시는 깊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거룩해져 갈 수 있고, 또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이 귀한 말씀, 이 고마운 말씀들을 통해 복이신 하나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들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