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11.25. 금요기도회 - 그를 경외할지어다(시편 22-3)

20161125FE1 (#1).mp3.zip






설교일 : 2016년 11월 25일 금요일

설교분문 : 시편 22편 22-31절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씩 회전하고 있는데 그 속도가 정말 엄청납니다. 한 시간에 1666킬로미터, 그러니까 한 시간에 서울과 부산을 거의 두 번씩 왕복할 만큼 빠른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서 이것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과학자들이 그렇다니까, 또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니까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인식하고 느끼는 것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항상 ‘사실’로 존재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사실’은 여전히 사실로 남아있지 그것 자체가 움직이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은혜로운 ‘사실’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그런 하나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이 ‘사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믿음과 현실감은 다 다릅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 사실을 확신하면서 항상 이 사실을 실감하면서 살아가지만 어떤 성도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이런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작아 보이는 차이는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평상시에는 그 차이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을 겪게 되고, 당황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실감하며 살던 사람들은 잠시 흔들렸다가도 금새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믿음과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계속 흔들립니다. 당황하게 되고 쉽게 좌절하며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믿고 그런 힘과 유익을 누리지만 다른 사람은 똑같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못 할까요? 그 이유는 두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없던 믿음이 생기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믿음을 가지려면 그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도 똑같이 경험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말한 것입니다. 음식을 실제로 먹어 봐야, 그 맛을 진짜로 알게 되듯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도 그런 과정이 꼭 필요하고, 그렇게 얻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실제적인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저 머리로만 개념적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끊임 없이 하나님을 경험했고, 그 경험을 통해서 얻은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극심한 고난과 고통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처음에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에는 그저 거기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탄하고 탄식했습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완전히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이번만큼 힘들었던 상황 속에서 몇 번이고 자신을 건져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해 냈습니다. 힘든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자신을 곤경에서 건져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경험들로 부터 얻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처음에는 그저 탄식과 한숨으로 시작되었던 그의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확신있는 기도로 바뀌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찬양의 서원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경험했던 고난과 어려움 자체는 결코 선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고통은 선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다윗은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반복해서, 어려움과 고통이 반복된 횟수만큼 변함 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사실’ 하나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항상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그렇게 하나님을 몸으로 배우는 시청각 교제가 되어 주었습니다. 


만약 다윗의 인생에 좋은 일만 있었다면, 복되고 즐거운 일만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갑자기 찾아온 고난 중에 그런 하나님을 기억해 낼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시 힘을 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그렇게 담대하고 아름다운 헌신을 약속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항상 좋은 일만 계속되고, 평안한 일들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바람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정말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려면, 또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고통과 고난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속에는 여전히 죄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항상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충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좀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과 행복한 일만 계속되면,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결국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고난과 고통은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을 막아주는 예방주사이고 또 치료제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우리가 더 가까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를 더욱 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선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시는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과 고통 덕분에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선하고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믿는 사람들이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해서, 그리고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분명히 부족함이나 연약함, 그리고 고난과 고통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에게는 그런 것 조차 엄청난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불평하고 불만스럽게 여기고 화를 내고 하는 그런 반응만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악하고 부정적인 모습들은 바꾸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악하지 않은 약함도 있고요 악하지 않은 부족함도 있습니다. 이런 약함과 부족함은 그것 자체로 나쁜 것들이 아닙니다. 그저 약하고 부족한 것이지요. 


저는 예전에 제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 때문에 항상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 사실 자체를 굉장히 부끄러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의 마음은 어떻게든 그 사실을 감추고 가리려는 노력으로 나타났지요. 그런데, 어느 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족한 것이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만약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화를 내고 부끄러워 해야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부족한 것이고 약한 것이기 때문에 화를 내고 부끄러워하면서 감춰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 이후에 저는 저의 연약함이 주는 유익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보석같은 은혜와 섭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저의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들까지도 새로운 의미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고쳐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화를 내야하고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단순히 약한 것이고 부족한 것이라면 그렇게 반응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나타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 부족함과 약함을 통해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또 국가적으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악함과 약함을 구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약함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약함이 주는 상처와 피해만 입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거꾸로 사는 것 같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함, 교회 안에 있는 악함은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손대기 어렵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그러면서 약함과 부족함은 자꾸 잘라내 버리려고만 합니다. 마치 그 약한 곳을 우리의 치부처럼 여기고 그것을 창피하게 여기면서, 어떻게든 강함으로 바꾸려고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제대로 경험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더 가난하고 무지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겠다는 특별한 헌신을 약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약함과 부족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고난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고 멸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 어려움이, 그 고통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잠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작든 크든 우리는 이런 것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는 현재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서 과거의 어려움과 고난을 선하게 사용하신 하나님을 기억해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꾸어 현재의 고난과 고통을 넉넉하게 이기는 능력으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모든 일이 다 끝난 후에, 그것 때문에 더 확실히 알게 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믿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을 돕고 격려하는 자리에 서게 될 다윗과 같은 자신의 모습을 기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시고 고통 중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비록 연약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탄식하고 한탄하는 우리들이지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탄식과 한탄을 믿음의 고백으로 바꾸시고 찬양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탄식하던 우리들을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로 세우실 것입니다. 혹시 한탄하고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들어가더라도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꼭 붙들어서 결국 승리하게 하시고 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속에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