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16년 12월 1일 목요일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저의 마음에 큰 부담과 정말 큰 일 난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을 주는 것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과 너무나 많이 다른데, 우리는 이미 그런 그런 사실 앞에서도 위기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참된 신앙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고 무감해 졌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작고하신 옥한흠 목사님은 혹시 한국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나 멀리 와 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깊게 공감했는데, 한국교회 신앙의 그런 모습은 거기서 바른 방향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가던 방향으로 더 많이 나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교회의 신앙은 적어도 큰 흐름에서는 이미 회복이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행태를 보면 이런 진단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하나님을 올곧게 섬기는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해오셨으니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도 이 나라 곳곳에는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작은 교회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고 또 그렇게 싸우고 있는 한 소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고, 큰 흐름이 어떻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가, 우리 자신이 어떤가 하는 것이었지요. 한 교회, 심지어 한 나라 안의 교회 전체가 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는 언제나 남아있고 흥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진짜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속해 있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쓸 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 특히 바울을 사랑했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하고 흔들렸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믿음이 깊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더 그랬지요. 빌립보서는 이런 빌립보의 성도들을 돕고 격려하기 위해서 특별하게 쓰여진 편지였습니다.
힘들다면 바울이 훨씬 더 힘들 것입니다. 그는 지금 노령으로 옥에 갇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바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기운 찬 편지, 그러면서도 따뜻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빌립보서는 굉장히 역설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역설적인 모습이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서가 그 어떤 편지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마음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 무엇보다도 빨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되는 것을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도 유익하지만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살면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도 좋지만, 죽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야 말로 바울이 가장 소망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 때문에 자신이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자신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 말이지요. 이렇게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가장 소망하는 것보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을 앞세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으로 넘어가 보면 거기에도 바울을 닮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이 사람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돕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그에게로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만 이 사람이 바울을 도우러 와서는 거기서 목숨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중병에 걸렸습니다. 물론 편지를 쓸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완쾌시켜 주신 상태였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투병 중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깊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한 에바브로디도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돌려 보내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중병에 걸렸는데, 그 병이 아니라 자신을 걱정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 때문에 근심에 빠졌던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 받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받는다는 것은 단지 행동을 본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흉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한 마디로 그것은 ‘타인 중심의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중심에 두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였고, 에베브로디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을 흉내내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오늘 한국 교회의 신앙은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님을 닮은 마음이 없으니까요.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앞세우고, 하나님을 앞세우는 사랑이 너무 부족하니까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그렇게 다른 이들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한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바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도 행복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그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존재와 삶을 통해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