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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7.01.05. 신년특별기도회 - 4.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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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7년 1월 5일 목요일

본문 : 히브리서 11장 11-12절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만 해도 아브라함이 자녀를 낳을 가능성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쉽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의 별을 보고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해 진 아브라함은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고,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쓸 데 없는 짓을 했다고 아브라함을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똑같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셔서 그 일을 이루시겠다고 다짐 하셨지요. 그런데, 그 때 아브라함은 아흔 아홉이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설득되어서 그 약속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라는 곧바로 이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잉태능력이 없었던 사라는 처음 약속을 주셨을 때부터 그것은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라가 이제와서 남편 이야기를 듣고서 갑자기 믿음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사라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집에 한 번 더 찾아오셨습니다. 텐트 바깥에서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던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사라를 찾으셨습니다. 그 때 사라는 텐트 안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찾으시자 그는 갑자기 하나님께서 지난 번에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약속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사라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큭큭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날아가던 새도 웃을 만큼 말도 안되는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웃음이 상당히 언짢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네(니) 아내 사라가 왜 저러냐? 왜 웃으면서 내 말을 비웃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지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돌아올 때에 내가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네가 부명히 웃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웃었다, 안 웃었다 유치한 어린 아이들 싸움 같지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너 지금 웃었지? 나중에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이 되는지 한 번 보자’하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두번째 방문으로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되었습니다. 100세가 된 할아버지와 91세가 된 할머니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통해서 수많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 보게 되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할 때, 믿음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진짜로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통해, 그들의 삶에 그리고 이 세상에 하고 싶어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을 위해서, 또 하나님과 이 세상을 위해서 꼭 믿음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라가 이 믿음을 갖게 된 이후에 그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일,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선 성경은 사라의 믿음이 사라 개인의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했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할렐루야! 우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욱 읽어내려 갔지만, 실제로 여기 나오는 ‘단산’과 ‘잉태’라는 말 사이에는 사람이 절대로 건너 뛸 수 없는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단산이 ‘0’이라고 한다면 잉태는 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1’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0 다음에 당연히 1이 오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로 0은 절대로 1이 될 수 없습니다. 0을 아무리 더해도, 또 아무리 곱해도 0은 0이지 1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1은 아무리 작아도 ‘있는 것’이지만 0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힘으로는 0과 1 사이를 절대로 건너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요. 0이 1이 되게 합니다. ‘단산’이 ‘잉태’가 되게 하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게 합니다. 그 간격을 뛰어 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통해 일하시면 우리는 0이 1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산이 잉태가 되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더 놀라운 일이 남아 있습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실제로 아이를 낳는 능력면에서 보면 사라는 죽은 사람 같은 한 사람이 아니라 아예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라나 죽은 사람이나 그런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죽은 사람에게서 생명이 하나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무수한 생명으로 번성했습니다. 0이 1일 되더니 그 1이 100만이 되고, 1000만이 되고 ….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통해 그렇게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사라의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또 믿음의 능력을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제 믿음이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 믿음도 잘 흔들립니다. 해 뜨면 사라지는 안개같이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제가 여러분에게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에 대해서 설교할 때마다 먼저 제 믿음을 돌아보고 제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곤 합니다. 이 믿음을 달라고, 이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할 때도 저는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또 너무 너무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저의 믿음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 놀랍고 위대한 믿음, 0이 1이 되게하고, 그 1이 100만이 되고, 1000만이 되게 하는 이 믿음을 나에게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생각할 때, 언제나 나 자신이나 환경부터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능과 불가능을 따지고,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요. 심지어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 내 판단에 정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도 그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는 기도하지도 않고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키득대는 사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 렌즈를 통해서 이 세상과 나의 인생,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나 객관적인 상황은 나이 많아서 단산한 사라같고 죽은 사람같은 같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나올 수 없고,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제로인 상태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믿음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일이든 행하실 수 있다는 것과 둘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면 반드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두 쪽나도 말이지요. 내가 어떤지는, 나의 형편이 어떤지는, 그리고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0이어도 좋습니다. 나는 단산한 사라여도 좋습니다. 죽은 사람 처럼 아무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리고 보이지 않은 말씀으로 아무 것도 없이 이 세상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저는 이번에 제가 그동안 너무나 머리만 많이 쓰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머리로 ‘나’를 너무 많이 생각하면서 살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구요. 그리고 어쩌면 ‘나’라는 전제, ‘내 생각’이라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 진짜 신앙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단산한 사라가, 죽은 자와 같던 사라가 잉태하게 되고 만국의 어머니가 되는 이야기를 다시 묵상하면서, ‘나’만을 생각하고, 내 머리를 믿으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것을 깨달았다고 제 믿음이 갑자기 완전해지지는 않겠지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저의 믿음도 또 다시 흔들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이 가지는 능력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믿음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0이 1이 되게 하시는 통로입니다. 1이 10000이 되고 100만이 되게 하시는 도구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복 주시고 세상을 복 주시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가 믿음을 준비할 때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며 설득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 부족하고 그 믿음 흔들려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시고, 사라처럼 그 믿음을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라의 믿음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단산하였지만 잉태를 믿는 믿음, 한 자녀도 없지만 열국의 어머니가 되는 꿈을 꾸는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하나님이 일하시게 해 드리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