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07.21. 요 8:1-11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본문 :  요한복음 8장 2-11절

 

 

   예수님께서 생수의 강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동안 대제사장이 보낸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 말씀이 그 아랫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바람에 그 날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 다음 날도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셨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었을까요? 나는 나의 양을 알고,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눈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 성전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설치한 거대한 덫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보고 계시니까요. 다 알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그렇게 하시면서까지 꼭 하셔야 할 일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참 분위기가 좋을 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준비해 두었던 덫을 펼쳤습니다. 그들이 마련한 덫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예수님의 옆, 그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 세우고는 예수님께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정말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목마른 사람들이 물을 받아 먹듯이, 배가 고픈 사람들이 음식을 받아 먹듯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요. 그러니, 그렇게 예수님께 권위를 빼앗기고, 인기를 빼앗기고, 사람을 빼앗긴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얼마나 배가 아프고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율법문제’를 들고 온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예수님을 무너뜨린다면, 예수님께 빼앗겼던 것들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그러면 예수님을 처리하는 것도 훨씬 쉬워질테니까요. 

   그런데, 간음하다 붙잡힌 사람의 처리방법에 대한 율법의 적용 문제는 그 당시 아주 아주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율법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히면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모세의 가르침,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가 법으로 그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 여인을 죽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모세의 율법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로마의 법에는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 되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것은 그 동안 사랑을 말씀하시고, 용서를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배치가 되지요. 그러면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요? 만약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놓아주라고 하면 그것은 로마법은 존중할 수 있지만, 모세의 율법은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가르치실 수가 없게 되고, 그 동안의 예수님의 말씀들도 모두 권위와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질문을 던지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점점 더 큰 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군중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팽팽한 긴장과 압박감은 점점 더 무거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전혀 뜻 밖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앉으시더니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끄적끄적 적어내려가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한 참을 그렇게 하고 계시니 이제 급해진 것은 당국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빨리 대답하라고 예수님을 재촉해 댔지만, 예수님은 느긋하기만 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렇게 격앙되어 있던 군중들의 감정도 조금은 차분해 졌고,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그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중심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때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적으셨는지 그것을 굉장히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근사치를 추측해 볼 수 있을 정도이지요. 우선 우리는 그 내용을 추측해 보기 전에 예수님이 왜 하필 그런 행동을 취하셨는지 그 이유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2절을 보면 그 날은 초막절의 큰 날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말인데요.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은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 지지요.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면 안식일을 어긴 것이 됩니다. 희안한 일이지만 그게 그렇게 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무엇이 일이고 일이 아니고를 구별할 때, 그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나 유명한 랍비들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명한 랍비들은 사람이 종이에다가 펜이나 붓을 가지고 무언가를 적으면 그것은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사람이 자기 손가락으로 땅에다가 무언가를 적으면 그것은 또 일이 아니라고 가르쳤지요. 종이에 무엇을 적으면 그 흔적이 오랫동안 남게 되지만, 흙에다 적으면 바람이 그 흔적을 지우기 때문에 그렇게 그렇게 두 가지를 구별하였다고 합니다. 아주 희안한 기준이지만 그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날, 예루살렘의 당국자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또 여차하면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그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그 율법을 가지고 간음한 여인을 재판하는 재판관의 자리에 세웠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웃음 거리로 만들려고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가만히 앉으시더니 땅에다 손가락으로 글을 적으셨습니다. 안실일에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날 이 행동을 가지고 그들에게 그렇게 물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어기고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너희들도 잘 알지?’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율법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율법에 무식한 사람이 아니야. 율법이라면 너희들이 지키는 전통과 랍비들의 가르침까지 훤히 꿰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는 이 사람을 재판할 재판관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땅에다 적으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땅에다 적으신 것은 그 여인의 죄다, 아니다 거기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죄의 목록이었다, 혹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말씀이었다 많은 주장을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곧바로 그 여인에 대한 판결을 내리신 것을 볼 때, 그 내용은 바로 그 여인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재판관들이 어떤 판결을 내리기 전에 판결문을 적으니까요. 예수님은 판사로 그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판결은 이미 율법이 명백하게 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율법을 따라 판결문을 적고 또 읽어주실 수 밖에 없으셨는데요. 그 판결문은 이랬습니다. 우리 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시작!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 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율법과 어긋나는 판결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율법대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돌로 치라고 선고하셨지요. 하지만 주님은 거기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라는 단서를 하나 붙여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단서 덕분에 여인은 일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100퍼센트 지키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만 남을 판단하고 평가할 자격이 있고, 그래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벌 주면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율법도 그렇고 세상의 법도 그렇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허울 좋은 말잔치가 되어 버리니까요. 

    그 여인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그 여인은 더 이상 존중해 주어야 할 인격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죽어 마땅한 쓰레기 같은 존재이고, 그러니 예수님을 옭아 맬 덫으로 사용 해도 괜찮다고 보았지요. 그렇기는 거기 모여 있던 군중들도 비슷했습니다. 그들도 그 여인을 그저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그래서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당연한 사회의 잉여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은 의롭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 여인을 그렇게 정죄하고 처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당연한 권리와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향해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다수가 된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 다수는 두 사람이 될 수도 있고, 1000명이나 10000명이 될 수도 있는데요. 한 사람이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저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은 그 집단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혼자 있을 때는 바르게 생각하고 판단하다가도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되면 분별력 없이 무분별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그만큼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이미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되어 버린 그들이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너희’를 해체시켜 얼굴을 주시고 이름을 주신 다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군중으로 있을 때 그들은 모두 의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정죄하고 돌로 치기에 충분한 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개인이 되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기들도 죄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저질렀던 그 죄만 저지르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로울 것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워 졌습니다. 그런 죄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의인이라도 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 뒤로 숨어서 한 사람을 정죄하고 또 죽이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벌 주는 것은, 죄 없는 사람이 죄 있는 사람을 정죄하고 벌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세상과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재판관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정죄하고 벌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고 벌을 주는 그 사람이 지은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어긴 법을 어기지 않았고, 그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그것에 걸맞는 책임을 지우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잘못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죄를 지었지요. 그것과는 다른 옳지 않은 행동을 했습니다. 모든 행동이 가지는 무게가 다 다르고, 그래서 이 잘못과 저 잘못이 같은 것이 아니며, 크기와 무게에 따라 받아야 할 비난과 져야 할 책임이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으로서 다른 죄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때로는 벌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의인인 줄 아는 뻔뻔한 죄인이 되고, 그 날 예수님 앞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당국자들처럼 되고, 서슬이 퍼래서 그 여인을 죽일 생각만 하는 비정한 군중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의는 알지만 긍휼은 모르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여인을 데리고 왔던 당국자들도, 그리고 그를 정죄하며 손에 돌을 들었던 군중들도 한 사람 한 사람 자리를 떴습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자리에 앉아서 땅에다 무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그 넓은 성전 안에 예수님과 그 여인 둘만 남게 되었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우리 예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죄인을 “여자여!”라고, 당신의 어머니를 부를 때 쓰셨던 그 고상하고 높은 언어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여인이 태어나서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불린 적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그 더러운 죄인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여전히 존중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안심시키고 계셨습니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예수님 앞에 서도록 준비를 시키신 것이지요. 이제 사람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의 고발과 정죄는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졌지요. 그런데, 여전히 누가 남아있습니까? 참되고 영원하신 재판관이신 예수님은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 분의 판결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람들의 평가나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 하면서, 그들의 좋은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로 사람들의 법정에 서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들이니까요.

   이제 예수님의 최종 판결이 울려 퍼집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지은 죄가 있습니다. 그것도 작은 죄가 아니었지요. 예수님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죄를 작다고 하신 적도 없고,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죄하시는 대신에 그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온 세상의 재판장이 되셔서 말이지요. 그리고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만 덧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발견하면 그 죄인을 정죄하고 거기 걸맞는 벌을 주는데 발이 빠릅니다. 우리는 서둘러 고소자가 되고 검사가 됩니다. 그리고, 형을 선고하는 재판관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관심은 늘 그 죄인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죄인들에게 바라시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의 왕이요 심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날,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가서 다시는 이런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는 마지막 판결문을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일처리 방식이 뭔가 석연치가 않아요. 그러면, 이 여인이 지은 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그 죄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사회법도 아닙니다. 율법이에요. 그것도 작은 죄가 아니라 돌에 맞아죽을만큼 엄청난 죄이고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죄가 이렇게 쉽게 용서되고, 또 없었던 일처럼 되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은혜로울 수는 있지만 부당하고 불의한 것 아닙니까? 정직하고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의 성품에도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아무런 댓가 없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 없이 그 엄청난 죄가 사라져 버린 것이니까요. 만약 이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이고, 무언가 다른 이야기가 남겨져 있지 않다면 이 이야기만큼 부당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우리 주님의 판결문 속에는 이 이야기가 미처 다 들려주지 못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판결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요. 첫번째 판결은 당국자들과 군중들을 향해 선고 되었고, 그 때 선고된 것은 ‘사형’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판결은 여인에게 선고되었는데, 그 때는 ‘용서’가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형’이 ‘용서’가 되고 ‘무죄’로 변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사형선고’를 ‘무죄선고’로 바꾸신 것일까요? 첫번째 경우처럼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땅에다 쓰신 것 또한 두번째 판결을 위한 준비였을 것입니다. 그 판결과 관련된 내용을 적으셨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렇게 여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시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을 풀어주기 위한 보석금이나 손해배상 같은 것 말이지요. 

   이사야서 42장으로 한 번 가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1133페이지 입니다. 이사야서 42장 1절부터 4절까지 한 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저 부터 읽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고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의를 시행할 것이며 /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너무 은혜로운 구절입니다. 특히 저처럼 자신이 상한 갈대같고 꺼져가는 등불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이 네 구절 을 보면서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세우시는 일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생각시는 분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정의를 세우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요. 법을 예외를 두지 않고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법을 아주 엄격하게 그리고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바로 서게 될테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에는, 성경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그 법을 지켜야 할 우리가 너무 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의를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우리에게 곧이 곧대로 적용하신다면 하나님 나라는 바로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같은 죄인들은 그 나라에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세우시는 방식은 사람들이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방식과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거칠지 않습니다. 그 분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면서, 죄인을 제거하면서 정의를 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가 꺾이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시면서 그 나라의 엄한 정의를 세워 가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합니까?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를 지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지은 그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은 전부 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시는 것. 상한 갈대 같은 우리, 꺼져가는 등불 같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을 주시고, 하나님의 진노는 저주는 홀로 가져 가시는 것. 그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 두번째로 땅에다 적으신 것은 ‘십자가’라는 단어였고, ‘내가 저 여자 대신 죽을 것이다’라는 문장이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신 후에야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용서와 무죄를 선고하실 수 있으셨다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인인가요? 누군가를 함부로 정죄하고 또 돌을 던져도 괜찮을만큼 충분히 의로운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듯이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늘 제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우리들도 과녁을 한 참 벗어난 화살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고 피치 못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때에도 지나치게 의인의 자리에 앉으면 안됩니다. 함께 재판관이 되어 있는 많은 사람 속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잊어 버린 마음없고 교만한 바리새인처럼 되면 안됩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으면 안되는 한 없이 부족하고 악한 인생들입니다. 그 날 우리 주님께서 당국자들이 가져다 놓은 덫 속으로 들어가신 것은 그 여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십자가가 기다리는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서고,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거기 서서 죄인인 나를 보고, 베풀어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바라 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죄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힘입어 죄인들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날마다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하고 복된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가 죄가 없어 의인이고 죄를 짓지 않아 의인이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2.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자신을 죽이신 십자가의 예수님께 감사합시다. 나의 의가 아니라 늘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지해서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