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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7.02.12. 주일오전 - 마지막 축복 1(에베소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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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6장 21-24절

 


  1. 다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자


우리가 이제 에베소서의 마지막 인삿말 부분까지 왔는데요.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다시금 기억해야 할 것은 에베소서가 ‘교회의 책’이라고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이런 별명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세우셨고 또 교회가 무엇이며, 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하는 것을 에베소서만큼 분명하고 충분하게 다룬 성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베소서를 하나님의 전신갑주와 기도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 하시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교회란 결국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전투를 벌이는 하나님의 군대이고, 그 싸움을 잘 싸우고 이기려면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시니까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싸우는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하늘의 군대가 움직여서 꼭 필요한 곳에 함포사격을 퍼 붓습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그저 나 혼자 잘 믿겠다고 신앙생활을 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엄청난 지원군을 포기하고 홀홀단신 전쟁터로 나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거기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전쟁을 하고 또 승리하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나서 자신이 자신의 더 자세한 사정과 형편을 알리기 위해서 두기고를 보내는데 두기고가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시작하고 연습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통해 자신의 사정과 형편을 남김 없이 알리고 있습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지요. 바울은 18절에서 ‘모든 기도와 모든 간구를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체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가 이런 기도가 되려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나누는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 뿐만 아니라 나쁜 일도, 성공한 일 뿐만 아니라 실패한 일도, 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잘 하지 못하는 일도, 자신의 고민과 아픔도,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얻은 은혜도… 삶의 구석 구석을 모두 나누고 공유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기도가 모든 기도와 간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삶을 그렇게 세세하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성도가 아닌 사람들의 교제와 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라고 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술마시며 나누는 교제보다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교제는 어떤 모양이 되어야 할까요? 우선 말씀드린 대로 삶의 모든 부분을 나누고 공유하는 속깊은 삶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그저 친한 친구와 나누는 교제나 마음 잘 통하는 직장동료와 나누는 교제와 차이가 없겠지요.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반드시 서로를 위한 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굳이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의 고민과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지금 그 사람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성도와 나누는 모든 대화는 서로를 위한 기도제목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의 교제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로 이어질 때, 성도의 교제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되고 능력있는 나눔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할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어디 계시지요?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얼 하실까요?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믿음을 잘 지키라고, 힘든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인내하라고, 이 세상에서 더 영광스럽고 더 향기로운 삶을 살라고 말이지요. 그것을 위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과 생각의 떨림까지 헤아리면서 계속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 기도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라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흉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느끼게 되고,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아들이고 딸일 때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다가 자기 자식 낳아 길러봐야 그 사랑을 진짜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다른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 그 대화가 비록 그저 한 주간 살았던 일들이나 이런 저런 신변잡기에 불과하더라도 그 안에서 서로의 기도제목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많으면 어려워지니까 오늘은 이 사람이다 정하시고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신앙적인 상태도 살펴 보시면서 무엇이든 한 가지만 기도제목을 찾아보시기 한 주간 그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또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싸워주고 또 함께 싸워주는 영적인 전우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매순간 치열하게 영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변하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믿음의 모습이 바로 그런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지요. 절대로 혼자 싸우지 마십시다. 모두 함께 싸우는 전우가 되십시다. 가리고 감추고, 그럴 듯한 모습만, 성공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지 마십시다. 제 경험으로 보면 그래 봤자 자기만 손해입니다. 자기만 힘듭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도 좀 하세요. 힘든 이야기도 좀 하시구요. 부끄러우면 얼마나 부끄럽겠고 오해를 받으면 얼마나 받겠습니까? 또 부담을 주면 얼마나 주겠습니까? 원래 성도끼리는 부담도 좀 주고 폐도 좀끼치고 그렇게 부대끼며 사는 겁니다. 그래야 함께 사는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물론 염치는 좀 잘 챙겨야 하지만 그것만 잘 조절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폐를 끼치고 부담도 주고 받으면서 서로 끈끈해 지는 것이 바로 성도들이고 그래야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가진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천하의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모든 것들을 성도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게 교회고, 거기에 우리가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더 여시구요. 삶을 더 열어주세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저절로 기도할 수 있게 그렇게 해 보세요. 정말입니다. 혼자 끙끙대다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십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기도하는 전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II. 평안을 빈다


이제 바울은 마지막 인사말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23절과 24절인데요.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바울의 마지막 인삿말은 기도로 되어 있는데요.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서 제일 먼저 빌고 있는 것이 그들의 평안입니다. 성도 여러분 ‘평안’이 무엇이죠? 그렇습니다. 마음이 편한 것이 바로 평안입니다. 아마 이 평안이야 말로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의 복인 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걱정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고, 괴롭히는 사람도 없어서 그저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평안이지만, 실제로 이런 평안을 계속 누릴 수 있는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 누리는 평안은 그저 아무 일이 없어서 마음 불편한 것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 뿐이지 막상 그런 평강은 얻고 나서 보면 건강하고 돈 많고 성공한 사람들의 평안처럼 지루하고 무료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성경이 평안을 말할 때, 항상 전제로 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화평한 관계가 평안을 만들어 내고 끊이지 않는 평안의 원천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화평에 대해서 여러 번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화평은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이 두 가지 화평을 모두 누리고 있어야, 진짜로 평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두 가지 화평중에 첫번째 화평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주로 1장과 2장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깨어진 우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또 우리와 다시 화해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드신 화평은 얼마나 확실하고 견고한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 화평에 관한 한 완전히 안심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서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 모든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의 진짜 이유이니까요. 여러분, 왜 우리 개인의 인생이나 이 세상이 문제를 없애보려고 그렇게 끊임없는 애쓰고 힘쓰는데도 계속해서 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문제들은 이전에 있던 문제들보다 더 크고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지 아십니까? 그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인데 모두들 그 해결방법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으니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그 화평이 취소되고 깨질 수 없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이 정말로 우리 인생과 이 세상 모든 문제의 답이 됩니까?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그렇게 우리가 망가뜨려 버린 하나님과의 화평이 우리 구주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복구되었을 뿐아니라 이제는 망가질수도 없고 깨질수도 없는 튼튼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길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하나님과의 화평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화평이 삶으로 누려지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바울은 또 다시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 화평을 알고 있는 것과 그 화평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모두 그저 ‘나는 하나님과 화평하다’는 것을 아는 수준이 아니라 그 화평을 진짜로 누리며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랐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빌고 있지요.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의 화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 되심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삶, 생명이 되고, 기쁨이 되고, 삶의 이유와 보람이 되고 행복과 감격이 되어 주시며,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에덴동산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복음을 믿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될 때, 이런 삶이 실제 우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런 복된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평을 빌어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다루는 두번째 화평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주로 4장 이후에 설명되어 있는데요. 사실 이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맺혀지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치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참 만족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거리낌 없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실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런 신뢰가 생기게 되면 그 때 부터는 그 사람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것 있다면 그것은 제가 저희 집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예전에는 저희 애들에게 무척 엄했습니다. 매도 자주 들었고 매를 들면 말 그대로 반쯤 죽여 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아도 별로 화가 나질 않습니다. 화가 나지 않으니 당연히 소리치는 일도 줄어들었고 잔소리 하는 일, 매를 드는 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물론 그래서 그 악역을 저희 집사람이 모두 감당하게 되었고, 애들은 예전만큼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는 부작용은 생겼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갑자기 개과천선한 것은 그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신다면 분명히 저희 집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그만큼 제 손에 쥐고 제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 드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희 아이들의 하나님이시라면 저에게 그러셨듯이 저희 집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하나님이 되어 주실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갈등하며 다투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이 악한 일을 하거나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일 때도 있지만, 실은 그저 그 사람이 내 마음이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기 때문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 때 우리는 그렇게 화를 내고 다른 사람과 다투며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충분히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의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그 사람이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주장하다가 그게 안되면 그렇게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 화평을 제대로 알고 그 화평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비록 이렇게 되는 은혜는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 자리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쉼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은 종교가 되고 또 다른 율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와 있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고 못 마땅한 것이 많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평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 쉽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서로 화평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찟고 피를 흘려 이루어 놓으신 화평을 믿고 의지하면서 이 화평을 누리기를 소원하고 애쓴다면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평 속에서 서로 화평한 화평의 사람들로 기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III.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모두 한 편입니다. 예수님 편이고 또 하나님 편입니다. 서로 마음을 더하고 힘을 합해서 함께 싸워야 하는 한 편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평합시다. 그리고 서로 화평합시다. 함께 그 은혜를 구하고 또 구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고 서로 하나되는 은혜를 구하며 살고, 또 실제로 그 은혜 안에서 함께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겠고, 우리 하나님은 또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게 하신 목적 중의 하나도 바로 실은 그 화목과 평안을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우리의 삶을 화목제물로 내놓고 함께 하나가 되어 예배를 드릴 때, 위로는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고 옆으로는 성도들과 다시 화평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해 주시고 서로 서로 화평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끝나고 또 오늘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화평을 알고 그 화평을 누리며 사는 평안을 아는 사람들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기도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참 축복입니다. 오늘은 우리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축복하며 참 사랑으로 한 번 기도했으면 합니다. 무슨 감정이 있고, 무슨 섭섭함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 내려놓으시고 그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빌어 주는 마음으로  얼굴을 떠올리면서 간절히 기도해 주시고요.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완전한 화평을 되찾고 또 누리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 그 동안 다른 성도들과 온전히 화평하지 못했던 것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화평 안에서 성도들과도 화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