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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7.01.29. 주일오전 - 너희를 위하여 항상 감사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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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고린도 전서 1장 4-9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본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니, 어떤 사람은 동그랗다 하고, 어떤 사람은 네모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모라고 하면서 저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그것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어떤 것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정말 많이 부족합니다.  첫째 어떤 것이 열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열 가지를 다 보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볼 수 있는 것들 중에서도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을 바라 볼 때, 자신의 눈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은 본문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교회나 혹은 함께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다른 성도들을 바라볼 때, 그리고 나아가서 이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전제로 놓아야 할 정말 중요한 태도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요. 우리가 이런 관점을 잘 유지할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눈과 가장 비슷한 눈으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런 것들을 가장 바르고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는 그야 말로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점들을 다 가지고 있는 교회 문제의 전시장이었습니다. 교만의 문제, 파당의 문제, 서로가 서로를 멸시하는 문제, 성적인 타락의 문제, 가난한 성도들이 무시당하는 문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성도들의 수준을 정하고 내가 더 낫네, 네가 더 못하네 하고 싸우는 문제 등등… 정말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도 부끄러운 문제들까지 끌어안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데요. 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이라면 이런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낼 때, 무슨 말부터 하겠습니까? 심하게 꾸짖는 말을 하거나 실망과 분노를 표시하는 말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듣기 좋은 말은 하기가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아주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엉망으로 망가진 교회, 문제 투성이인 교회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돌보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 말은 죽어라 하고 안듣고 말썽만 부리는 자녀와도 같았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이상하게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생각할 때마다 속이 상해 죽겠다는 말 대신에 나는 너희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같은 그런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어떻게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발견하고 우리 삶에 적용할 때, 우리들 또한 성도들을 그리고 교회와 이 세상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문제가 많고 부족하더라도 말이지요. 


우선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면서 가슴아프고 고통스러운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부족한 것, 그들에게 있는 문제들 보다는 이미 있는 것, 이미 하나님께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크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 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자주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현실을 무시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맞는 것을 맞다고 하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하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까 틀린 것, 아닌 것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애써 현실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려고 하게 되지요. 그러나, 참으로 긍정적인 태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맞는 것은 맞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진짜로 긍정적인 것입니다. 신앙 안에는 이렇게 참으로 긍정적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없는 것과 부족한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족하고 없는 것, 그리고 심지어는 문제들까지도 분명하게 보면서도 동시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된 의미에서의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은혜’를 보았습니다. 비록 죄와 결점으로 인해서 많이 더러워졌고 망가져 있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지요. 바울이 보기에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 교회에 소망을 두고 계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모든 부족함과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신앙에 큰 상처를 줄만큼 거칠고 부족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도저히 믿는 사람이라면 저럴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요. 남들만 그런가요? 실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살다보면 얼마나 부족함이 많고 결함이 많습니까? 스스로도 실망하고 놀랄 정도로 별로인 모습은 또 얼마나 자주 보게 됩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무시하거나 절망하고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소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거둬가지 않으시는 은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다듬어 가시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교회 위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교회 안에서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은 그 교회와 그 교회의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계시며, 여전히 소망을 두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더 성도되게 하고, 교회를 더 교회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주신 은혜는 풍성한 은사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회는 특히 언변과 지식에 큰 은사가 있었던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는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내용을 서로에게 그리고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 잘 설명하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고린도 교회가 여러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형편없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두 가지 은사에서 만큼은 풍성함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하나님이 고린도 교회를 여전히 붙들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였고 또 그래서 여전히 고린도 교회에는 소망이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보았고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그런 하나님께,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다 시피 저는 지난 해에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남들은 다 그냥 지나가는 갱년기를 겪어내느라고 그랬는데요. 정말 제게 지금까지 살면서 겪어냈던 시간들 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굉장히 크고 중요한 것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감사하는 마음과 감사의 언어를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이상하게도 저에게는 감사하는 일이 참 쉽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감사하기가 힘들면 억지로라도 감사하라고 했지만 성향적으로 볼 때, 저는 그런 것도 잘 안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이번에 작은 일들, 그리고 평범한 일상적인 일들이 얼마나 감사한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상황만 생각하면 전혀 감사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날 하루 편하게 잠을 자면 그게 그렇게 감사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가볍고 기분좋게 일어나면 그게 감사했습니다. 하루라도 감정이 요동치지 않는 날이 있거나 심장이 쿵광대면서 저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날이 있으면 그게 그렇게 감사했습니다. 숨차지 않고 설교를 마친 날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만약 제가 예전처럼 없는 것, 부족한 것, 고통스러운 것만 보았다면 저는 감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없는 것, 부족한 것, 사라진 것들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있는 것들, 작고 평범하지만 너무나 귀한 남아있는 은혜들을 보게 하셨고, 제가 여전히 그런 은혜들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 해가 저에게는 일생 그 어떤 기간보다도 감사가 많은 기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해, 그리고 누군가에 대해서, 교회나 이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혹시 진짜로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없는 것들,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들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는 지금 당장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지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 교회이건, 다른 치체들이건 혹은 나 자신이건 지금 당장의 모습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낙심하지요. 그렇지만 바울은 문제투성이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문제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절망스러워 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의 우리의 모습이 어떻다고 해도, 여전히 감사할 수 있고 여전히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절대로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도로 부르시고, 자녀로 부르셨으며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신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온전한 교제를 하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 부르심을 취소하시거나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해 주시려고 치르신 대가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내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주셨으니까요. 우리가 자격있을 때 그러셨습니까?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그러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연약할 때,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그 때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삼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그런 그 분이 이제와서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에 차지 않는다고 우리를 나몰라라 하시겠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들로 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끊임 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거두어 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으로 우리를, 그리고 우리 교회를 그렇게 빚어가실 것이고, 이 세상을 돌보실 것입니다. 


바울이 그 많은 문제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린도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할 수 있었고 또 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자신을 보고, 교회를 보고, 세상과 사람들을 보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대하며 사는 사람들, 그러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무엇을 보는 우리의 눈으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만스럽고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교회와 세상을 향해 여전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하나님의 신실하신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우리들 또한 감사와 소망을 잃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바른 눈으로 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올 한 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 하나님의 눈으로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감사와 소망을 잃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열어 주셔서,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눈을 더 많이 닮아가는 한 해, 그래서 더욱 더 감사와 소망이 풍성한 한 해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없는 것, 부족한 것 보고서 불평불만하지 말게 하시고, 있는 것, 남은 것을 보면서 감사하게 하소서.
  2.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사람들을 보고 교회를 보게 하소서.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