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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2.2.요한복음 13장 1-20절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요한복음 44)

 

 

 

날짜 :  2020년 2월 2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3장 1-20절 

 

 

유월절이 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저녁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웃옷을 훌렁 벗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허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 매시더니 대야에 물을 떠 오셨습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종들이 주인이나 귀한 손님들의 발을 씻어줄 때의 차림새였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식사를 하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리고 메시야일 거라고 생각하던 높은 분이 식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가장 비천한 종들의 모습이 되어 그런 사람들조차도 자존심 상해 하는 일을 하시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늘 1절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3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놓치기가 쉬운데요. 사실 1절과 2절은 본 스토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신 것에 대한 배경설명으로 덧붙여 진 것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더라” 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이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비천한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2절과 3절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급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가룟 유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없으니까요. 그 자리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발도 씻겨 주셨지요. 그러면서 씻음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중에 넌지시 유다가 들어야 할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유다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든 유다의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 앞에서 당사자만 알아들을 수 있게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종이 되어 자신의 발을 씻겨 주실 때, 그리고 넌지시 자기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씻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 마음에 찔림과 깨달음이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있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유다도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에는 정말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너무 너무 가슴아파 하셨고요.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말 그대로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그 사랑은 유다에게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거기 있었던 제자들은 두고 두고 이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함께 식사를 하시고 떡을 떼어 주셨으며, 발을 씻겨 주셨던 그 일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을 것입니다. 특히 실수를 하고 죄를 지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면 그 날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 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다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시되 정말로 끝까지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끝이 없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죄스런 마음과 생각을 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스스로도 용납하지 못할만큼 큰 죄를 짓고, 그 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예수님이 이래도 날 사랑하실까, 이렇게 못되고, 이렇게 더디 믿고, 이렇게 완악한 나를 사랑하실까 의심이 되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주시고 발을 씻겨 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들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제 자리로 돌려놓아 주실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또 수건으로 깨끗이 물기까지 닦아 주셨습니다. 마치 그 발이 깨끗해 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 질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무래도 예수님께 발을 씻겨 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은 너희가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거라고 하시면서 발을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계속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가만히 곱씹어 보면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내가 네 발을 씻어주어야만 너는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셨으니까요. 베드로는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깜짝 놀라서 이번에는 그러면 발 뿐 아니라 몸을 전부 씻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괜한 고집을 부렸습니다. 예수님이 내 발을 씻길 수는 없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말씀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억지 덕분에 이 말씀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거기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목욕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온 몸이 깨끗한 사람들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온 몸이 아니라 발을 씻어 주셨던 이유입니다. 목욕한 사람은 발 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고,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여러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애초에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예수님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되었으며, 그래서 예수님과 전혀 ‘상관 없던’ 우리가 예수님과 깊이 ‘상관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욕’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분의 보혈로 우리의 전 존재를 덮고 있던 죄라는 숯검댕이를 씻음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목욕을 한 다음에도 우리에게 계속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 번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우리 발을 더럽히는 죄를 처리하지 않은 채로 그냥 내버려 두면 그것이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 합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를 편들어 주는 이야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부담 없는 이야기만 좋아하지요. 실제로 미국의 어느 유명한 부흥강사는 설교자들에게 충고하기를 설교를 할 때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청중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강단에서 죄에 대한 설교가 울려 퍼지면 청중들은 강단 아래에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환한 얼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눈물도, 그 죄를 용서받은 기쁨이 넘치는 얼굴도 희귀해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선배들보다 죄를 덜 짓고 살아서 그럴까요? 의롭고 깨끗하게 살아서 죄를 생각해도 덤덤하기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이야기, 회개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듣지 않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죄 자체에 대해서 무뎌져 버렸기 때문에 그런 값진 것들을 다 잃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우리 주님과 상관있는 사람이 되었지요? 우리의 온 몸에서 죄악의 숯검댕이를 당신의 보배로은 피로 씻어 주셨던 주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떻게 유지되어지고 깊어져 가지요? 그것도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또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발을 주님 앞에 내놓고서 그 발을 씻어달라고 부탁드려야 합니다. 때로는 그 일이 부끄럽고 꺼려지더라도 그 더러운 발을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그 발은 우리 주님만 씻어 주실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주님과 상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옿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 주와 스승이 되셔서 우리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 분의 제자요 성도들인 우리가 예수님처럼 서로의 발을 씻겨 주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때로 그 안에 가룟 유다같은 사람들이 끼어있을 때도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 한 명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겨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분명한 섬김의 행동이었습니다. 종들처럼 식사를 하는 도중에 섬기기 위해서 일어나신 것이나, 웃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신 것이나, 특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나 모두가 다 비천한 종의 행동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성도들이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가 바로 예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의 핵심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을 낮춰 서로를 섬겨야 하며, 그렇게 서로를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겨 주시고, 또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은혜로 시작되고 지금도 그 은혜 안에서 풍성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 사이의 관계,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지고 또 유지되어질까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사이의 관계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를 섬기시듯이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섬김과, 예수님께서 늘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그 용서를 통해서 이어지고 유지되어 집니다. 그 섬김과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서로 ‘상관 없는’ 관계가 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천국의 지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천국을 닮은 곳, 천국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의 지점이라는 말이 허무한 미사여구가 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과연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여러분은 천국이 어떤 곳이며, 천국은 왜 천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에 천국이 천국이 천국인 이유가 정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예수님의 사랑이 물처럼 흐르고, 그 분의 사랑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이지요. 우리가 천국을 그렇게 좋아하고 소망하는 것도 다 그래서 입니다. 그 나라가 ‘예수님의 사랑이 강처럼 흐르는 나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니까요. 그래서, 천국은 결국 섬김과 용서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늘 우리들을 섬기셨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까요. 우리는 천국에서 예수님의 섬김 속에서 기뻐하며, 그 분의 용서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는 그 행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교회가 조금이라도 더 천국을 닮은 곳이 되려면, 교회의 혈관 인 성도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섬김을 닮은 섬김이 흐르고, 서로를 향한 용서가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천국을 맛보며, 서로가 맺은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천국을 닮은 행복하고 기쁨 넘치는 곳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 아시듯이 사랑하는 것,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용서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남들 밥 먹고 있는데 일어나 시중을 들고 싶겠습니가? 누가 나서서 험한 일 굳은 일 하고 싶어하고 남들 발이나 씻어주며 살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뉘우칠 줄 모르는 가룟 유다같이 구는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우리의 교만한 본성으로는 도무지 오를 수 없는 산과도 같지요. 주님도 그게 참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로 낮아지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렇게 인간이 되어서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해 보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도 나처럼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너희 안에 있는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도 끝까지 사랑하며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던 것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처럼 말이지요. 주님은 그런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복을 주려고 이런 말씀을 들려 주시는 것이니까요. 우리 15절부터 17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 볼까요? 다 찾으시고요.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성도 여러분,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고 심지어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은 자신을 낮추어 가룟 유다같은 우리들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이런 높고 큰 은혜 덕분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싶지 않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때마다 우리가 받은 이 은혜를 기억낼 수 있다면, 우리는 높아져만 가는 우리의 가당치 않은 마음을 주님의 마음처럼 낮고 복된 자리로 내려보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게 해 주시는 하늘 백성의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우리의 죄로 더럽혀진 우리의 발을 내어 계속 내어드리고 또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매일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죄를 씻어주시는 은혜 안에서 예수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몸을 낮추어 서로를 섬기며, 마음을 낮추어 서로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하늘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아들의 사랑의 나라를 닮은 행복하고 향기로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더러운 발을 주님께 내어드리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본을 따라 서로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십시다. 그렇게 주님의 섬김을 받고 용서를 받으며, 그 힘으로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용서하는 하늘 백성들이 되십시다. 그러면 주님이 하늘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며 사는 특별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더 많이 낮추고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용서하는 예수 향기 가득 품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늘 더럽혀 지기만 하는 나의 발을 주님께 내놓으며 살게 하소서. 용서하시고 씻어 주시는 은혜 안에 살게 하소서. 
  2. 우리도 주님처럼 할 수 있게 하소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 안에 섬김과 용서가 강처럼 흐르게 하소서. 이 곳이 주님 다스리시는 사랑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