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20년 3월 15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4장 1절
성도 여러분, 참 반갑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모두들 눈만 내놓고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아주 조금이지만 이제서야 우리 삶이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번 일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적잖게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우리를 이만큼 힘들게 만든 것은 아마도 질병 자체라기 보다는 그 질병이 만들어 낸 불확실성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잦아들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언제인지 우리로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다행히 지난 주중에 감염자 수가 세 자리에서 두자리로 줄어들었습니다. 확진자 숫자보다는 완치자 숫자가 더 많아졌구요.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놓이기도 하지만 또 다시 환자가 급증하는 일은 없을까, 또 우리나라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혹시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전 세계경제가 대공황에 빠져 버리지는 않을까?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주는 공포보다는 이런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들이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거의 모든 죄와 악들이 이 두려움에서 파생된다고 해도 과한 이야기는 아니지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이 두려움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게 될 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게 자기 목숨이건 아니면 사람이나 물건이건 간에 말이지요. 그리고, 둘째로 사람은 꼭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가능성 때문에 두려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제로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무엇을 잃어버리고 빼앗길 염려가 없을만큼 안전한 곳이고,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만큼 풍요한 곳이라면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세상은 전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제자들은 옆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이 제자들을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따라올 수 없다고 하셨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라라면 자기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고 자기 각오를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기는 커녕 저 살자고 새벽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셨지요. 다른 제자들은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기들의 모든 것을 걸었던 예수님, 그 동안 자기들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던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난답니다. 자기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말이지요. 제자들은 말그대로 졸지에 삶의 기반을 전부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게 될 거라는 말씀까지 하셨지요. 그렇다면 충성심이 베드로보다 훨씬 못한 자기들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베드로보다 더 심하게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겠지요. 제자들은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자기들도 베드로처럼 되지 않을지 그 모든 일들이 불투명하고 불안하기만 했으니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이런 근심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인데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날 바밤부터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이 두려움의 문제, 그리고 그 두려움이 만들어 낼 근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면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만 그런가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원리는 모든 시대의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고, 거기서 생겨나는 근심입니다. 우리가 그 두려움과 근심에 붙들리고 걸려 넘어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우리 인생의 귀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되어 버리지요. 어떤 분들은 나에게는 근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셔야 합니다. 자신에게 욕심은 없는지 말이지요. 만약 욕심이 있다면 근심도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도 있는 것이고요. 욕심이란 본질적으로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의 본능이 찾아낸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근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그 뿌리에는 두려움이라는 똑같은 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면 욕심과 근심은 함께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근심과 욕심을 다뤄낼 수 있으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롭고 능력있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14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오늘 본문 말씀을 이렇게 시작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는 이 말씀을 잘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겨 넣어야 합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과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 겉으로 보기에 이 두 말씀은 서로 크게 상관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믿음과 두려움은 아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말씀이야 간단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근심이라는 것이 이제부터 근심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금새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 말씀 덕분에 ‘근심하지 말라’시는 주님의 말씀이 늘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늘 욕심을 부리며 살지만 그 굴레를 벗어버릴 수 없는 인생들에게 진정한 복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두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근심이라는 우리 영혼의 불치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방법 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 방법 대로만 하면 근심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 사는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 ‘세상’은 지금 이 세상과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는 동기와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참 대단한 것 같아 보이지만요. 따지고 보면 참 별 것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움직여가는 주된 동기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욕심’과 ‘두려움’입니다. 이 세상을 발전시켜가는 동기가 되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은 이미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사실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심과 욕망이 꼭 필요한 것이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 욕심은 두려움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두려움의 다른 얼굴에 불과합니다. 욕심을 부려서 이 세상을 더 발전시키고 더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세상은 쇠퇴하고 사람들은 살기 힘들어 질까봐 그게 두려워서 인간은 욕심을 앞세우고 그 욕심을 뒤쫓으며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 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이미 그것말고는 자기를 움직여갈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서의 경쟁에서 이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두려움이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라는 전혀 다른 목적과 동기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세상에 속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세상을 이기게 해 주지 못합니다. 두려움과 욕심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지요. 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가득 채워줄 만큼 큰 것이 없고, 우리가 세상에서 얻으려고 하는 것마저도 충분히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탕자같은 인생들에게 쥐엄나무 열매도 넉넉히 주지 못하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이 감추고 있는 세상의 본 모습이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은 하나님을 믿음 속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실 수 있을만큼, 우리의 영혼까지 꽉 채워주실만큼 크고 부요하시며,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움 없이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정말로 욕심과 근심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믿으시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두려움을 이기고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근심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믿으면 근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믿으면 근심이 사라져야 합니다. 근심과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근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지요. 그 이유는 한 가지일 겁니다. 믿기는 믿습니다.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아직 주님이 말씀하신 그만큼은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충분히 하나님을 믿고 싶어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안그래도 적당히 살아지고,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그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면 안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당신의 귀한 생명을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생명을 아낌 없이 내어 주셨고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지불하신 댓가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때문에 그런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일까요? 우리가 뭐가 그리 귀하다고 말입니다. 그 답은 고린도 전서 5장 15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옛 사람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죽은 사람처럼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옛 사람의 방식이란 별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지요. 삶의 동기와 이유가 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옛 사람의 삶의 방식이고 그것이 바로 가장 본질적인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죄를 죽이시려고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사람들로 만드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 죄가 죽어야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중심으로 맴돌며 살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으니까요.
만약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는 계속 두려워하며, 욕심내며 그렇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두려움과 욕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그저 나에게 더 편한 쪽을 선택한 것이며, 그래서 생겨나는 불편함과 손해는 내가 감당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부름받은 삶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지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취하거나 버리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 그 구원과 함께 주어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이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처럼 두려워하며 욕심내며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맴돌며 살아가는 것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믿음을 소극적이고 작은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믿음이 정말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모르지요. 그래서 그런지 믿어라, 믿어라, 다른 일이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일 자체에 헌신하고, 정말로 믿는 사람이 되라고 하면 그 말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자기에게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 질 때가 되어야 하나님께 나아오지요. 물론 우리의 믿음은 분명히 그런 식으로 시작되고 또 성장해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말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긍휼이 풍성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이지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마지 못해서, 다른 방법이 없어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대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지요. 믿음을 아무리 아름답고 대단한 말로 표현하고 장식한다고 해도 이것이 기대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을 그렇게 오해하고 믿음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에 기대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기댄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의지한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요. 예를 들어 길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산을 오르는 것과 튼튼한 등산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르는 것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한 쪽 다리를 다쳤고 그래서 그저 자기 힘으로는 산을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지겠지요. 첫째로, 두 경우에 실제로 얻을 수 있는 힘이 완전히 다릅니다. 지팡이는 그 사람을 충분히 지탱해 줄 힘이 있지만 나뭇가지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두 경우에 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평안과 마음의 안정감이 완전히 다릅니다. 나뭇가지는 늘 불안합니다. 하지만, 등산지팡이는 마음 놓고 기댈 수 있지요. 그래서 이런 차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상으로 합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고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셔서 실수하실 수 없으신 분,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식언치 않으시기 때문에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 당신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시고 기반이 되시는 분. 완전한 지혜로 모든 것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섭리해 가시는 분. 믿음이란 바로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는, 기대고 의지하는 것 자체는 소극적이고 약한 일이지만, 그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위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만큼 말이지요.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 유행했습니다. 이 전염병은 숫자로는 7천만명에서 2억명, 비율로 따지면 유럽 전체 인구의 30-60퍼센의 목숨을 앗아간 아주 지독하고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는데요.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가 16세기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공적으로 또 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무언가를 답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시기의 목회자들은 오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고민하는 저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겁고 큰 짐을 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들 중에서 쯔빙글리라는 분의 이야기와 그 분이 남긴 시가 한 편 있어서 잠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다음은 그 내용입니다.
“츠빙글리가 1519년 1월 취리히의 목회자로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흑사병이 도시를 덮쳤습니다. 이 흑사병으로 인해 취리히 인구의 적게는 1/4, 많게는 1/3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시 취리히 인구가 7,000명 정도였는데 2,000명가량 목숨을 잃었습니다. 츠빙글리는 흑사병으로 자녀를 잃는 슬픔도 겪었습니다. 그는 목회자로서 매일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1519년 9월 말경 자신도 병에 걸려 앓아 눕고 말았습니다. 그는 11월 중순까지 거의 두 달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쓴 시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나의 힘, 나의 반석이시여
문밖에서는
죽음이 문 두드리는 소리
나를 위해 못 박히신
당신의 손을 높이 들어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당신의 음성이
내 생애의 한낮인 지금이라도
내 영혼을 부르신다면
나는 순종하겠나이다.
신앙과 소망 안에서
이 땅을 포기하고
천국을 얻고자 하나니
나는 당신의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츠빙글리는 회복되었고 이 경험은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츠빙글리가 1520년에 교황청에서 주는 성직록을 거부하고 온전히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로 돌아서는 결단을 내린 것도 이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츠빙글리의 이 절실한 신앙고백은 오늘날 스위스와 독일 개신교회 찬송가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도 없고, 근심과 걱정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그런 두려움과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거기 순응하며 살아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이겨내며 살아가느냐 하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차이는 절대로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가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몰아내 줄 때까지, 거기까지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게 주님께 기대야 합니다. 늘 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며, 그 믿음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명령하셨고, 그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신앙이 주는 능력과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바라고 추구하며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복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에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믿음, 두려움과 근심을 뛰어 넘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복되고 능력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